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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와 이태원, 그리고 20대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해상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그 배에는 476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고, 그중 304명의 안타까운 생명이 세상을 떠났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 여파와 아픔은 아직까지도 아물지 않았다. 

세월호 이후, 국립국어원은 세월호 참사의 주된 희생자였던 단원고 학생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세월호 세대'라는 말을 신조어로 선정했다. 시간이 흘러 세월호 세대는 20대가 되었고, 또 다른 아픔이 우리를 덮쳤다. 10.29 이태원 참사에서도 159명의 희생자 중 20대가 104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렇게 두 번의 참사를 겪은 청년들은 '세월호-이태원 세대'가 되었다. 우리는 소중한 친구와 가족을 잃었고, 생존자라는 트라우마와 무력감을 견뎌야만 했다. 

지난 5월 16일, 성균관대학교와 동국대학교 재학생들로 이루어진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 간담회 기획단원들은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인근의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에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 간담회를 개최했다. 그날은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지 정확히 200일이 되던 날이었다.

세월호의 아픔이 채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발생한 대형 인명사고로 인해 우리는 기억과 책임, 그리고 슬픔과의 연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행사를 준비하는 기획단원들의 마음은 저마다 달랐겠지만, 아마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테다. "세상이 너무 조용한 것 아닌가?" "대학이 이래도 되는가?" "온 사회가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적어도 대학생만큼은, 20대만큼은 이태원의 아픔과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의문과 부끄러움, 슬픔과 책임감을 안고 기획단원들은 행사를 준비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홍보부스를 진행하는 모습
성균관대학교에서 홍보부스를 진행하는 모습 ⓒ 정태건
 
어쩌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너무 큰 참사를 겪고도 그것을 제대로 애도하고 함께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강의실과 열람실로, 취업 전선으로, 아르바이트 현장으로 향해야 하는 우리는 정말 괜찮은 것이냐고. 서로 편을 가르고 혐오하기 바쁜 이 사회에서 대학생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괜찮은 게 맞냐고. 함께 수업을 듣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셔틀버스에 오르며 학교에 다니는 모두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다.

'정치 결벽증'의 공간… 게시판이 점점 사라지는 대학

첫 번째 기획단 회의에서부터 학내 공간 대관은 쉽지 않을 거라는 우려가 나왔다. 예상대로 학교 측은 쉽게 공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동국대학교는 외부인이 출입하는 행사를 위해 공간을 대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고, 성균관대학교는 "학교와 무관한 외부 단체 행사"라는 이유로 대관을 거부했다. 일각에서는 정치적인 행사를 왜 학교에서 진행하느냐는 비난도 있었다. 이 사회에서 대학의 역할이 무엇인지, 대학생은 어떻게 사회에 목소리를 낼 것인지 고민해보게 만드는 씁쓸한 장면이었다.

학교 측의 거절 사유였던 '정치적인 행사'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태원 참사는 정치적인 사건일까? 그렇다. 이태원 참사는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발생한 사건이고, 따라서 정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든 참사는 정치적이다. 참사의 아픔을 해결하는 데에는 정치의 역할이 필수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대학'은 정치적 논의에서 배제되어야만 할까? 대학에서 정치적인 발언이나 행사가 있어선 안 되는 걸까? 민주화 이후 대학은 정치와 결별하고 취업 사관학교 역할을 아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사회를 향한 다양한 의견과 비판을 개진하는 대자보가 붙던 게시판은 인턴십과 대외활동, 취업 관련 포스터가 차지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변화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대학은 정치적인 압력이나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명제가, 대학이 그 어떤 정치적 논의도 허용되지 않는 '정치 결벽증'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데 있다. 대학은 사회적 의제에 대한 공론의 장이 되어야 하며,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의 대학은 그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학내 게시판에 부착한 대자보
학내 게시판에 부착한 대자보 ⓒ 정태건
 
익명의 혐오는 연대를 이길 수 없다

기획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간담회 행사 홍보였다. 행사를 알리는 게시글을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 업로드하자, 예상했던 대로 조롱과 비난의 댓글이 이어졌다. 심지어 이태원 참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작성한 대자보 일부가 실제로 찢기는 일도 벌어졌다. 홍보 부스를 운영하며 학생들에게 홍보 유인물을 배부할 때에는, 이 유인물을 받는 학내 구성원들 중에 익명 뒤에 숨어 참사에 대한 2차 가해와 비난을 일삼은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힘이 빠지고 마음이 움츠러드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행사가 끝날 때까지 이러한 2차 가해들은 익명으로만 존재했다. 기획단원들의 취지를 반박하는 대자보를 게시하거나, 홍보 부스 등에 찾아와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개진하는 이들도 없었다. 간담회 행사에 찾아와 훼방을 놓는 이들도 없었다. 혐오는 이름을 갖추지 못했다. 우리가 힘 빠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익명의 혐오는 이름을 건 연대를 이길 도리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
 
 간담회 당일 서점 풀무질에 청중이 자리한 모습
간담회 당일 서점 풀무질에 청중이 자리한 모습 ⓒ 정태건
 
대학생이 묻고 유가족이 답하다

행사 당일, 참가자가 많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행사 시작 10분 전부터 자리는 만석이었다. 유가족 간담회 본행사에는 참사 희생자 이주영씨의 오빠 이진우씨가 패널로 참석했다. 간담회 1부에서는 이태원 참사의 타임라인과 주요 시사점들을 간략히 짚어보는 한편, 패널로 참석한 이진우씨와 대학생 사회자들이 대담을 진행했다. 희생자 이주영씨에 관한 회고로 시작해 참사 당일부터 지금까지 유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에 대해, 왜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하는지와 왜 진상규명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참사 당일 소식을 듣고 참사 현장으로 이동해야 했다던 이진우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과 기본소득당이 주관했던 '대학생 소셜투어 2기' 프로그램을 통해 접했던 세월호 유가족의 말을 떠올렸다. 입이 떼어지지 않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오직 팽목항으로, 이태원으로 자동차를 몰 수밖에 없었다는 증언. 그 생동하는 불안과 제발 아니길 바라는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이진우씨는 참사 이후로 어떤 일도 하지 못한 채, 다른 유가족들의 소식 역시 전혀 듣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는 말도 나눠주었다. 시간이 흘러 다른 유가족들을 만나 협의회를 구성하고 국정조사를 진행할 수 있었지만, 무언가 명확해지는 기분보다 더 궁금해지고,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의문만 커진다는 고백에서 정부의 사후 대처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진우씨의 발언하는 모습(간담회 2부)
이진우씨의 발언하는 모습(간담회 2부) ⓒ 정태건
 
이어서 이진우씨는 참사 직후 정부와 지자체, 여러 기관들의 행정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경찰에서 안내하는 절차를 따랐는데도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는 점, 시신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유가족이 직접 뉴스와 기사를 찾아 연락처를 갈구해야 했다는 점, 유가족에게 '왜 집에 가지 않느냐'며 화를 내는 경찰관이 존재했다는 점 등을 짚었다.

경찰과 공무원들의 태도는 참사 피해자의 유가족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투적인 사고를 처리하는 모습에 가까웠다고도 했다. 이태원 참사 100일 추모대회 때 시민합동분향소의 광화문 광장 이전을 불허하고 녹사평역 지하 공간만을 내어주겠다던 서울시의 행정은 여전히 국가기관들이 유가족을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로 대하고 있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무엇보다 2차 가해나 혐오발언 등으로 인해 마음이 아팠던 적 있느냐는 질문에 "당시 상황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2차 가해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신체적인 폭력을 쓰지 않았을 뿐이지 그건 직접적인 가해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에서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 상의 혐오발언이 갖는 막대한 폭력성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간담회 사회자(임진환)가 발언하는 모습
간담회 사회자(임진환)가 발언하는 모습 ⓒ 정태건
 
하지만 폭력적이고 모욕적인 순간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진우씨는 분향소를 지킬 때 시민들이 손을 맞잡고 말을 걸어주던 일, 참사 현장에 붙어있던 수많은 포스트잇을 읽던 날, 분향소 근처를 지나가던 이들이 용기 내어 영정 사진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작은 연대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이었다. 어떤 참사든, 그러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덜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희망을 얻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아가 이진우씨는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피해자 권리 보장, 재발방지대책 마련을 위한 특별법(아래 '이태원 참사 특별법')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작금의 '놀러가서 죽었다'와 같은 모욕적인 발언이 더 이상 떠돌지 않고, 다시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책임자들이 처벌의 무거움을 알고 자신들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또 다른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동세대 청년들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간담회를 준비하며 겪었던 학우들의 무관심이 다시 떠오르는 지점이었다. 변화를 위해 갈 길이 멀지만,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연대를 다짐했다.
 
 간담회 2부를 진행하는 모습
간담회 2부를 진행하는 모습 ⓒ 정태건

슬픔은 우리의 하나 남은 힘

간담회 1부가 끝난 뒤에는 참가자들이 유가족에게 응원의 말을 포스트잇에 적어 보드에 붙이는 시간이 있었다. 2부에서는 그렇게 모인 참가자들의 메시지와 질문에 답하면서 간담회를 이어갔다. 한 포스트잇 속 문장을 읽다가 울컥하기도 했는데, 거기엔 "슬픔은 우리의 하나 남은 힘"이라고 적혀 있었다.

참사의 아픔을 떠올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무기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슬퍼할 수 있는 용기, 이 사회의 바닥을 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자리에서부터 무언가를 시작해야만 한다. 오늘 현존하는 슬픔과 함께하는 것으로부터 내일을 바꾸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기획단원들이 준비한 이번 간담회가 그 작은 시작이 되었기를 바란다.

지난 5월 15일 서울대학교에서 출발한 '이태원 참사 200일 유가족과 함께하는 대학 연속 간담회'는 성균관대학교와 동국대학교 외에도 2주에 걸쳐 이화여자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고려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인천대학교, 인하대학교, 성공회대학교까지 총 14개교  250여 명의 학생들의 참여로 치러졌다.

연속 간담회 이후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6월 7일부터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농성을 시작했고, 8일부터는 릴레이 행진에 더불어 보석으로 석방된 박희영 용산구청장의 출근을 저지하기 위한 농성에도 돌입했다. 6월 임시국회에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반드시 통과되도록, 그리고 진상규명에 대한 염원이 적힌 보라색 티셔츠와 흰 소복을 입고 땡볕에서 싸우는 유가족들의 눈물이 그칠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과 연대가 절실하다.

#이태원#유가족#간담회#성균관대학교#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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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이태원 참사 유가족 대학 연속간담회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노래와 그밖의 것들을 좋아합니다. 글쓰기는 무엇을 온전히 '좋아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호흡을 조율하여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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