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요인들은 이승만과 국민대표회의 등으로 어지러워진 임시정부의 혼란수습에 나섰다.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21일 이승만 탄핵 심판위원회의 심판서를 접수하고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함"이라는 '주문(主文)'을 발표함과 아울러 새대통령에 <독립신문> 사장·주필인 박은식을 선임하였다.
박은식은 이에 앞서 1924년 12월 11일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고 유고상태인 대통령 대리를 겸직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의정원에서 이승만의 탄핵이 결정되면서 정식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박은식의 나이 67세, 1911년 53세에 망명하여 만주와 해삼위, 중국관내의 수백만 리를 오가면서 국권회복투쟁에 나선 지 14년 만에 임시정부의 최고 수장에 선출되었다.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과도기의 적합한 인물로서 추대된 것이다.
박은식은 3월 24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조촐한 취임식을 갖고, 이어서 상하이 시내 3·1당에서 교민들과 함께 순국열사에 대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추도사에서는 선열들의 뜻을 받들어 조국광복을 위해 정진할 것을 다짐하고 참석한 각료들을 격려하였다.
새 대통령에 취임한 박은식은 국무총리에 군무총장 노백린을 임명하고 나머지 각료들을 모두 유임시켰다. 박은식 내각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박은식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 노백린
내무총장 이유필
법무총장 오영선
학무총장 조상섭
재무총장 이규홍
박은식은 성격이나 체질적으로 관직에 연연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한말에 남다른 학식과 자질에도 불구하고 능참봉에 그치고, 그마져 버리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선 일이나, 망명시기 각지에서 각급 단체를 조직하고서도 윗자리를 양보하는 등의 모습에서 입증된다.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혼란 수습을 위해서, 그야말로 '임시'적으로 추대되고, 그럴 요량으로 수락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그동안 이승만의 탄핵과 맞물리거나 운영을 둘러싸고, 그리고 이념과 시국관에 따라서, 정부의 개조를 주장하는 안창호 중심의 '개조파', 정부를 아예 해체하고 새로 조직하자는 이동휘·문창범 계열의 '창조파', 김구·이시영 등의 '현상유지파' 등으로 크게 갈렸다. 박은식은 어느 쪽에도 편향하지 않으면서 통합을 주도하는 입장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더 이상의 분열과 이합집산을 막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통치구조를 바꾸기로 하였다. 박은식의 뜻이기도 한 개헌작업이 의정원을 중심으로 추진되어 대통령 대신 국무령과 국무원으로 조직되는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데 대체적으로 인식을 같이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국무령을 최고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의 제3차 개헌안이 1925년 7월 7일 발효되면서 박은식은 '개정임시헌법 시행 축식(祝式)'을 갖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3개월 보름 정도의 재임기간 중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하고 하야한 것이다.
권력의 속성 탓인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위정자들은 그 자리에 앉으면 권력강화와 연장을 위해 음모를 꾸미거나 위법적인 행위를 일삼는데 비해 박은식은 짧은 기간에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은 개헌을 통해 권력을 분산시키고 지체없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승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박은식은 하야하면서 남긴 <임시 대통령 고별사>에서 신국무령 후보인 성망이 높은 이상룡에 협조하여 국사를 원만히 수행케 하도록 요망하였다. 고별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신국무령 후보인 이상룡씨는 〇〇숙덕(宿德))으로 성망이 소저(素著)하고 재만 다년에 광복사업을 위하여 효로한 성적이 많은 즉 우리 정국을 유지할 능력이 유한 것을 가히 확신할지며 우리 사회에 소위 지방별이니 당파별이니 하는 고질도 금일 차거로 인하여 소석(消釋)이 될지니 우리 전도에 이익될 점이 많은 즉 제군은 아무쪼록 여를 협조하든 충성으로서 신국무령을 협조하여 국사를 원만히 수행케 하면 오족 전도에 막대한 행복이라 하노라.
대한민국 7년 7월 7일
임시대통령 박은식 (주석 6)
주석
6> <독립신문>, 1925년 10월 21일치, 〇〇란은 해독 불가.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