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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 이상룡의 임청각의 군자정. 그는 “공자·맹자는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고 하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석주 이상룡의 임청각의 군자정. 그는 “공자·맹자는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고 하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 장호철
 
이상룡의 조각은 실패했다. 각료에 지명된 인사들이 하나같이 취임을 사양(거부)한 것이다. 상하이 쪽 인사들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하여 주로 만주의 무장독립운동가들을 기용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이상룡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인물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했다. 김동삼·김좌진·오동진·윤병용·윤세용·이탁·이유필·조성환·현천묵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상해로 간다면 만주지역 독립운동 전선에는 커다란 공백이 생기게 된다. 더구나 그때는 일제가 만주 군벌과 '삼시협정'을 맺어 한인 독립운동 세력을 압박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불똥은 정의부 내에서 일어났다. 1925년 말 제2회 중앙의회가 중앙행정위원회에 대해 불신임안을 제출하자 중앙행정위원회는 이에 맞서 중앙의회 해산을 결정하고 총사퇴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25년 10월 10일자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김동삼은 선뜻 상해로 부임할 수 없었다. (주석 7)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표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표지 ⓒ 민족문제연구소
 
만주 무장독립운동 세력이 조직한 정의부의 내부 사정도 크게 작용했다. 당초의 약속과 다르다는 주장이었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 간에 큰 충돌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 원인은 이상룡이 중앙의회 의결사항을 무시하고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데서 비롯되었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들은 임시정부의 두 파견원 오영선과 이유필이 만주에 왔을 때 신민부의 대표들까지 불러 4개의 합의사항을 만들고, 이면으로 임정의 최고 책임자를 정의부에서 추천한 인물로 추대하자는 사항을 제시한 바 있다. 이들의 이러한 제시를 중앙행정위원들이 받아들여 이상룡을 추천하고, 또 이상룡은 행정위원들의 말을 듣고 상해로 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그런데 중앙행정위원들은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는 건에 대해서는 중앙의회의 안건에 상정하지 않고 4개의 합의사항만을 의결사항으로 보냈다. 그 결과 중앙의회에서는 4개의 합의사항을 임시정부의 각료를 위원제로 고치는 것과 장차 임정을 만주로 옮기자는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이 안건을 통과시켰다. 중앙의회의 의결대로 임시정부를 만주로 옮길 것이라면 이상룡이 상해로 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주석 8)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이상룡으로서는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본인이 원했던 자리가 아니고, 떠밀리다시피 하여 추대된 것인데, 결국 조각이 안 된 것이다. 해서 이듬해 2월 18일 미련없이 국무령을 사임하고 베이징을 거쳐 서간도 호란(呼蘭)으로 돌아왔다.

공은 탄식하기를 "내가 늙은 몸으로 헛된 명예에 몸을 굽히는 것은 절대 내 평소의 바람이 아니다. 그래도 이번에 몸을 한 번 움직인 것은 각각의 의견들을 조정해서 통합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그럴 가망이 없으니, 내 어찌 여기에 지체하랴"하고, 국무령직을 버리고 귀로에 올랐다. 북경에서 난리를 만나 이듬해 봄에 호란으로 돌아왔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가을달이 사람 청해 경솔히 문을 나섰다가
 봄바람을 짝으로 삼아 집으로 잘 돌아왔네
 산도 울고 노하는 시기가 난무하는 판국에서
 웃는 낯으로 맞이해 주는 건 너 꽃뿐이로다. (주석 9)

조각에 실패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의정원은 이상룡의 후임으로 양기탁을, 다시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선출했으나 이들은 부임하지 않았고, 한동안 의정원 의장 최창식이 국무령을 대리했다. 1926년 7월 홍진이 취임했다가 12월 9일 사임하고, 12월 10일 김구가 선출되는 곡절을 겪으면서 임시정부는 겨우 정상화되었다. 

서간도 무장전쟁론자인 이상룡이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자 초긴장했던 일제는 그가 사임하자 한시름을 놓으면서도 계속해서 그의 뒤를 쫓았다. 손부 허은 여사의 기록이다.
 그 시절을 증언해준 허은(1907~1997) 여사.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을 남겼다. 후손 이항증 선생의 허락으로 이 작품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시절을 증언해준 허은(1907~1997) 여사.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을 남겼다. 후손 이항증 선생의 허락으로 이 작품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이항증
 
3월에 국무령 사임하고 상해에서 서간도로 나오실 때 일경들이 당신 뒤쫓고 있다는 보도를 천진에서 신문을 보고야 놀랐다. 그때 당숙(이광민)이 함께 수행했다. 신문을 본 당숙은 속으로 '저 칠순 노인 가다가 만약에 잡히는 날이면 말이 아니다. 일본놈 손에 걸리기만 하면 영 끝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천진부두에 도착하니 웬 사람들이 와 사진을 찍어 갔다. 신문기자였는지 중국경찰인지 모른다 했다. 당시 어른께서는 하이칼라 머리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계셨다. 복장은 역시 중국옷을 입었고 그래야 중국사람 행세 하거든, 사진 찍어간 것이 마음에 걸려서 배에서 내리자마자 이발관에 가 머리와 수염을 빡빡 깎아 드렸다. 연락선 시간이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날 밤은 여관에서 자야 했다. (주석 10)


주석
7> 김병기, <만주지역 통합운동의 주역 김동삼>, 14쪽.
8> 채영국, 앞의 책, 226~227쪽.
9> 권상규, 이상룡의 <행장(行狀)>, <석주유고(하)>, 161쪽.(이후 <행장> 표기)
10> 허은, 앞의 책, 14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상룡#석주이상룡평전#이상룡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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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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