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룡은 가족이 있는 남만주 반석현 호란으로 돌아왔다.
상하이를 다녀온 후 체력이 크게 약화되어 거의 외부출입이 어려웠다. 이즈음 중국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1925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가 중국 봉천성 경찰청장과 협정을 맺고, 한인 독립운동가 탄압을 위해 재만 한인의 단속을 더욱 강화시켰다.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하고 무기 휴대와 집회·결사를 금지했다.
이에 따라 중국 관리나 불량배들은 한인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일반 한인을 살해하여 일본군에 바치고, 포상금을 받았다. 일제가 노린 대목이다. 일제는 한인의 목을 가져오면 40원, 산 채로 끌어오면 20원을 주었다. 이를 노린 중국인 살인귀가 많았고, 정의부에서는 보안대를 편성하여 한인 마을을 지켰다.
1920년대 중·후반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해온 정의부(正義府)의 내홍은 깊었다. 여러 단체를 통합하다보니 이해관계, 운동방략에서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1925년 11월 1일 백암 박은식이 상하이에서 서거했다. 임시정부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상룡은 <박 백암에 대한 만사>를 지었다.
박 백암에 대한 만사
표연히 바람에 나부끼어 구르던 잎 하나
와신상담의 생애 몇 십년
가난한 동포 비호하려도 광화천만간이 없고
완악한 꿈 외쳐 깨우는 필여장면이 있었네
반 국 바둑도 못 마치나 정신 더욱 완고하고
석잔 술 주량도 못 미치니 덕성 더욱 온전했네
목숨 다하여 돌아갈거나, 어느 곳으로 돌아가나
미친 먼지 닿지 않는 천제의 고을이시기를. (주석 1)
고향의 종친회에서 1926년 안동 도곡에 있는 산소의 비(碑)를 바꾸는 공사를 준비하면서 장손인 이상룡에게 비문은 의뢰하였다. 다음은 이에 대한 답신 <고향 여러 종족에게>중에서 종중의 관계 아닌 앞 부분이다. 이 시기 그의 심기가 읽힌다.
지난 봄 한 번 편지 한 후 다시 아득히 막혀버리니 고향 산천을 바라보매 다만 스스로 답답할 뿐입니다. 가을이 깊어 가는데 여러분들 기거 만중하신지요? 외도(外陶) 감호(鑑湖)의 흉보(凶報)는 얼마나 참혹하겠습니까? 가을걷이는 고루 풍성하여 공사간에 유감이 없으신지요? 구구한 저의 울적한 마음 두루 간절합니다.
저는 지난 가을 우연히 실속 없는 헛된 명성에 얽매여, 만리 길 상해를 다녀왔고, 세모(歲暮)는 북경 여관에서 보냈지요. 금년 중춘에야 비로소 산채로 돌아왔는데 이내 다리가 마비되는 증상을 보여, 앉고 눕는 것이 불편하여 탕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17년간 습기가 많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가 서린 바다에서 얻은 병일 것입니다. 척서군도 황달로 신음하고 있으며 섭아(燮兒)의 병도 아직 쾌차하지 못하였습니다. 심경이 이러하니 어찌 세상사는 경황이 조금인들 있겠습니까? (주석 2)
주석
1> <석주유고(상)>, 241쪽.
2> <석주유고(상)>, 50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