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야르바크르에서 밤기차를 탔습니다. 오후에 출발한 기차는 하룻밤을 달려서 다음날 낮에 앙카라에 도착했습니다. 두 시간여의 연착까지 포함해 거의 24시간을 기차 안에서 보냈습니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길게 기차를 탄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앙카라는 튀르키예의 수도입니다. 여전히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최대 도시는 이스탄불이지만, 튀르키예 공화국의 공식 수도는 앙카라입니다. 여행을 준비하기 전까지, 저는 앙카라는 행정 수도쯤 되는 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에 들어와 수도로 새로 건설된 도시라서, 역사도 그리 깊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매듭을 풀면 아시아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매듭이 있었는데, 그 누구도 풀지 못하다가 알렉산더가 칼로 내리쳐 끊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미다스의 손'이라는 전설도 있죠.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가, 자신의 딸까지 황금으로 변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전설 모두 지금의 앙카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르디우스와 미다스는 모두 프리기아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리기아 왕국의 수도인 고르디움은 현재 앙카라 주에 속해 있죠.
이후에도 앙카라는 아나톨리아 지역의 교통 중심지로 번성했습니다. '앙고라 토끼'나 '앙고라 고양이' 등에 붙은 '앙고라'가 앙카라의 옛 이름입니다. 덕분에 이런 동물의 털을 이용한 섬유 생산지로도 발달했죠.
중세 이후 앙카라는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아나톨리아 중부의 중소 도시 정도 규모였죠. 앙카라가 지금처럼 성장한 것은 물론 튀르키예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기 때문이었죠.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에서 패배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열강에 의해 분할될 위기에 처했죠. 이런 상황에 반발한 지도자가 케말 파샤, 곧 아타튀르크였습니다.
이미 오스만 제국 각지에는 서구 열강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튀르키예의 독립 세력이 모일 수 있는 지역은 아나톨리아 중부의 고원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앙카라는 케말 파샤가 연합군에 맞서 오랜 기간 전투를 벌여 지켜낸 도시였죠. 이 앙카라를 중심으로 독립 세력은 집결하기 시작합니다.
1920년 4월 23일, 케말 파샤는 앙카라에서 튀르키예 대국민의회를 수립합니다. 그렇게 본격적인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죠. 1923년까지 이어진 전쟁 끝에 튀르키예 공화국은 독립을 인정받았습니다. 점령군은 결국 아나톨리아에서 떠나야 했죠.
그렇게 1923년 10월 29일,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됩니다. 케말 파샤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독립전쟁 기간 본부 역할을 수행한 앙카라가 튀르키예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죠. 이스탄불의 오스만과는 다른, 앙카라의 튀르키예가 시작된다는 상징적 순간이었습니다.
독립 당시 앙카라는 인구가 10만도 되지 않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수도의 역할을 하기 부족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자유롭게 새로운 도시를 계획할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었죠. 지리적으로 국토 중앙에 가깝다는 것도 유리한 점이었습니다.
도시 계획이 실행되고, 수도의 역할이 부여되면서 앙카라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현재 앙카라는 500만의 인구를 가진 튀르키예 제2의 대도시가 되어 있죠.
언급했듯 앙카라 역시 역사가 깊은 도시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지금 앙카라의 모습은 대부분 현대에 들어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탄불과는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도 있겠죠.
이스탄불이 오스만이라는 제국의 수도였다면, 앙카라는 튀르키예라는 공화국의 수도입니다. 구시대의 제국이 아닌, 새로운 공화국 튀르키예는 앙카라에서 탄생해 앙카라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앙카라에 도착한 날은 마침 6월 25일이었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한국전쟁 기념일이더군요. 마침 앙카라 역 앞에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가 있었습니다. 혹시 무슨 행사라도 있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기념비 주변은 조용했습니다. 그래도 6월 25일인데, 조화나 안내문 하나도 없었습니다. 현지인 직원 한 분이 기념탑 주변 정원을 청소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조용히 기념탑을 돌아보았습니다. 기념탑에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튀르키예군 전사자의 이름과 사망일, 고향이 쓰여 있었습니다. 도시의 이름이 익숙했습니다. 제가 여행한 도시도, 잠시 스쳐간 도시도 많습니다.
그들은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입니다. 그들이 죽은 땅에서 저는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제가 다녀갔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이 기념비 앞에서 마주서 있었습니다.
앙카라는 제 튀르키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였습니다. 앙카라 여행을 마치고는 이스탄불로 이동해 바로 다음 국가로 넘어갈 예정이었으니까요. 한 달 가까이 이어진 튀르키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케말 파샤의 묘역이었습니다.
역시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동선을 설계하다 보니 그리 되었을 뿐이지요. 하지만 저는 그것이 꽤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나톨리아의 역사를 한 바퀴 돌아본 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이 케말 파샤의 묘역이라는 것이요.
아나톨리아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과 국가, 문명의 끝에 현대의 튀르키예 공화국이 있었습니다. 그 공화국을 세웠던 케말 파샤의 묘역은 튀르키예 여행을 마무리하기 아주 적절한 곳이었습니다. 아나톨리아를 한 바퀴 돌아 튀르키예에 도착했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전쟁 기념비를 보고 와서일까요, 저는 어쩐지 케말 파샤보다는 그와 함께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을 더 떠올리게 됩니다. 이 묘역에는 케말 파샤와 함께 그 이름 없는 튀르키예 사람들의 꿈이 함께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케말 파샤가 생각했던, 그와 함께한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튀르키예 공화국이 이곳에 있습니다. 어쩌면 튀르키예라는 공화국 전체가 그들의 꿈이었습니다. 이 묘역에 함께 잠들어 있는 꿈이었습니다.
아나톨리아를 한 바퀴 돌아 앙카라에 도착했습니다. 100년 전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의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의 긴 꿈을 함께 한 바퀴 여행한 느낌입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