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17 15:05최종 업데이트 23.07.1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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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브라 ⓒ unsplash


올해 을지로에서 열린 서울퀴어퍼레이드 무대 행사의 사회를 맡았다. 워낙에 뜻깊은 자리이니만큼 흔쾌히 수락하긴 했으나 같은 이유로 마음에 부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행사 날이 다가올수록 걱정거리가 하나둘씩 늘어났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의상, '무엇을 입을까?'였다.

'피어나라, 퀴어나라'라는 올해 행사 슬로건의 의미를 잘 담으면서도 또 무대 의상이니만큼 지나치게 무난해선 안 됐다. 거기다 퀴어퍼레이드가 어떤 행사인가, 사회가 규정한 성 역할과 성별 이분법을 뛰어넘어 참가자들이 각양각색의 '퀴어한 매력'을 뽐내는 현장이 아닌가. 더운 날씨에도 짙은 분장과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한 드랙 아티스트(고정된 성 역할을 넘어 개성 있는 메이크업과 의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들)들이 돌아다니는 곳이다. 만만하게 준비하고 가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퀴어퍼레이드에서 무난하게 입을 수 없다는 결심과 사회자인 내가 공연자들보다 더 튀어선 안 된다는 고민 사이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나치게 튀지 않지만 굉장히 퀴어한 의상을 입을 수 있는 방법. 바로 스포츠 브래지어를 입는 것이었다.

사회에서는 주로 '여성복'으로 분류되는 옷이기에 만약 남자인 내가 입는다면 성 역할과 성별 이분법을 가로지르는 의상이 될 것이었다. 동시에 그 의상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 심지어 참조할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룹 샤이니의 태민이 솔로 활동 당시 브라톱을 착용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여담이지만 이런 선구자들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용기를 내기가 어렵다).

여러 영상과 사진을 살펴보니 코디만 잘하면 아주 이질적이지 않으면서도 내 개성을 퀴어하게 잘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밝은색의 크롭 후드 아래에 스포츠 브래지어를 받쳐 입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무대에서 입을 의상이 모두 도착한 날, 나는 도착한 스포츠 브래지어를 착용해 보았다. 그리고 머리 속으로 예상치 못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근데 이거, 왜 이렇게 편해?"

예상치 못하게 너무나도 편했던 스포츠 브래지어
 

퀴어문화축제 사회를 보던 필자의 모습. 화질은 선명하지 않지만 당시 어떤 복장을 입었는지 알 수 있다. ⓒ 신필규

 

사실 접으면 손바닥만 한 스포츠 브래지어를 보고 처음에는 온갖 걱정이 들었다. 너무 조이거나 작으면 어쩌지? 옷이 너무 불편해서 사회에 집중할 수 있을까? 내가 괜한 유난을 떤 걸까 그냥 평범하게 입을 걸 그랬나? 물론 그 옷을 그대로 입은 건 아니었다. 나에게 가슴에 덧댈 패드는 불필요했기에 탈부착이 가능한 옷을 샀고 패드는 받자마자 버렸다.

그런데 아무리 그랬다지만 막상 입어본 스포츠 브래지어는 적당한 신축성과 탄력을 가지고 있었다. 옷이 내 상체를 너무도 안정감 있게 감쌌다. 무언가를 입었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신체에 딱 붙는 옷이지만 내가 움직일 때 몸을 조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이건 거의 끈이 있는 크롭티를 입은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심지어 그것보다 더 편했다). 이 놀라운 발견을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돌아온 반응도 놀라웠다.

"있지 우리도 너 옷 봤는데, 어깨를 드러내서 끈이 보이는데도 그게 스포츠 브래지어라고 생각도 알아보지도 못했어, 너무 자연스럽게 거기 있어서"

예상치 못한 발견에 나는 신세계를 만난 느낌이었고(물론 일상에서 그 옷을 입을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스포츠 브래지어가 얼마나 편한 의상인지 주변에 간증과 예찬을 퍼트리고 다녔다.

하지만 여성인 친구들 중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건 그냥 내 몸에 잘 맞는 옷을 찾은 것이지 스포츠 브래지어라고 모두에게 편한 건 아니라는 게 그들의 말이었다.

실제로 스포츠 브래지어가 편한 사람도 있지만 체형 때문에 장시간 안정적으로 착용하기에 와이어와 후크가 있는 제품이 더 낫다는 사람도 있었다. 작정하고 뭔가 사회 운동을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시중의 어떤 제품도 몸에 제대로 맞는 게 없어서 그냥 브래지어를 안 입는 친구들도 있었다. 물론 몸이 편하니까 평소에는 브래지어는 착용하지 않고 지내다 운동을 하거나 몸을 많이 움직일 때만 스포츠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지인들도 주변에 꽤 있다.

내 몸에 맞으면 그건 다 내 옷

이상한 이야기로 읽힐지 모르겠다. 브래지어는 보통 '여성용'으로 분류되는데 남성인 나는 입기에 너무나도 편했고 오히려 여성인 친구 중에는 그 옷이 너무도 맞지 않아 입기를 꺼려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하지만 내 경험으로 이런 일은 자주 있던 편이었다.

가령 바자회에서 옷을 살 때는 따로 여성복과 남성복을 분류해 놓지 않아서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입어보고 잘 어울리고 맞기만 한다면 구매하기를 반복했는데, 옷의 실제 가격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찾아보면 여성복 쇼핑몰에 옷이 올라가 있었던 적이 많았다. 나는 체형이 가는 편이라 '남성복'으로 나온 옷을 입었을 때 어딘가 너무 크거나 남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 그래서 일부러 '여성복'으로 나온 옷을 샀던 적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여성용'으로 나온 옷이 체형에 잘 맞지 않아 나와 반대로 '남성용' 옷을 구매하는 여성 지인들도 주변에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혹스러운 일도 종종 발생한다. 가령 쇼핑몰에서 내 체형에 맞는 옷이 있길래 이것저것 입어보는데 사정을 모르는 점원이 나름 친절을 발휘해 '남성복은 다른 층에 있다'고 알려주는 일. 새로 산 옷을 입고 사람들을 만나러 갔는데 내 착장을 유심히 바라보던 누군가가 '그거 여자 옷 아니야?'라고 물어보는 일 말이다(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지만, 익숙한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만나면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던 어느 날, 당황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툭 내뱉은 적이 있다.

"여자 옷 남자 옷이 어디 있어, 잘 맞고 어울리면 그건 다 내 옷이야!"

옷에도 그 무엇에도 성별 붙이기를 그만하면 어떨까?
 

서울 명동 의류매장 쇼윈도의 진열된 옷들. 여성옷과 남성옷을 꼭 구분해야 할까? ⓒ 연합뉴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게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다. 성별 이분법과 성 역할이 공고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에 성별을 가져다 붙인다. 대중문화의 특정 장르, 특정 스포츠 분야, 특정 학문이 여성이나 남성에게 더 잘 어울리거나 어떤 성별의 전유물인 것처럼 굴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자신이 잘 즐기고 할 수 있는 분야임에도 거기에 부착된 성별이 신경 쓰여서 개인들이 진입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마치 잘 어울리는 옷 앞에서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돌아서는 것처럼 말이다. 얄팍한 구분 탓에 더욱 적성에 맞고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걸 만날 가능성을 접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패션계도 점점 변화하여 아예 성별의 구분이 없는 옷이 출시되거나 '여성복'과 '남성복'의 특징으로 여겨진 요소들을 마구 뒤섞는 옷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여기저기에 성별을 가져다 붙이는 것을 멈추고 사람들이 자신에 걸맞는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사족. 소위 '여성복'으로 출시되는 옷들을 입어보니 그전에는 몰랐던 불편함을 알게 되곤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주머니다. 주머니가 넉넉하게 부착된 '남성복'과 달리 '여성복'은 주머니 개수가 턱없이 부족하거나 너무 작거나 특히 재킷의 경우는 아예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 외형만 주머니인 척 꾸며놓은 옷도 있어서 이걸 구매자가 직접 절개를 해서 써야 하는 줄 착각한 나머지, 멀쩡한 옷을 칼로 찢을 뻔한 적도 있다. 누군가는 여성들이 핸드백을 들고 다녀서 그런 디자인이 나왔다고도 하는데 이제는 남자들도 클러치백을 패션 아이템으로 들고다니는 시대다. 그러니 바라건대 그냥 공평하게 모든 옷에 주머니를 많이 달아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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