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31 07:02최종 업데이트 23.07.31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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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좌파 교육감들이 주도해서 만든 학생인권조례가 학생 인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빚어진 교육 파탄의 단적인 사례"

지난 18일 한 초등학교 교사가 민원에 시달리다 사망한 사건을 놓고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가 한 언론에 전했다는 말이다. 보도에 따르면 이 관계자는 학생인권조례가 '과거 종북주사파가 추진했던 대한민국 붕괴시나리오의 일환'이라는 진단도 전했다고 한다. 이게 정말 대통령실에서 오고가는 현실 판단인가 의아한 수준인데, 공교롭게도 보도가 나간 후 이틀 뒤인 24일에 윤석열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교권을 침해하는 불합리한 자치 조례 개정'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름만 언급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학생인권조례를 겨냥한 말이었다.


이후 정부와 여당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학생의 인권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교권이 급격히 추락했다고 주장했다. 표현 방식만 다를 뿐 국민의힘 소속 주요 의원들 역시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하지만 학생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조례가 어떤 방식으로 교사들의 교직 생활을 위협했다는 것일까. 기사를 읽는 나뿐만 아니라 주장을 하는 여당 의원들도 이해를 하지 못한 모양새였다. 일례로 지난 25일 당 원내대책회의를 주재하던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조례의 어느 조항에 교권 침해 요소가 있는지 묻자 구체적인 답을 회피한 채 말을 얼버무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고만 발생하면 등장하는 책임 떠넘기기
 

지난 20일 오후 서울교육청앞에서 서울교사노조와 전국초등교사노조 조합원들이 ‘(서초구 S초등학교)신규 교사 사망 사건 추모 및 사실 확인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 권우성

 
초등학교 교사가 생을 달리한 이번 사건 뒤에는 과중한 업무와 민원 부담이 자리했다. 이건 단순히 개인적인 비극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다. 현직 교사들이 대규모 추모 행렬을 이어가고 자신들이 겪은 비슷한 경험을 증언하기 시작한 건 그래서이다.

대통령실과 여당의 반응이 의아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다. 사회적 문제나 구조적 참사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통상적으로 기대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반응은 일단 희생자에 대해 애도를 전하고 사태에 대한 책임감을 표하는 것이다. 이후에 상황에 대한 나름의 진단이 등장하고 그에 따른 대책이 발표되는데 대부분 기존의 체제를 보완하거나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진단과 대책의 내용에 대해서 여론의 평가는 나뉠 수 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나온 대책이라는 것이 형편이 없었던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직자들과 정치인들은 책임자로서 사태를 수습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언뜻 보기에 '학생인권조례를 손을 보겠다' 말도 대책 수립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제도를 보완하겠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국정 운영 책임자이자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책임에 대한 통감도 없이 무작정 '문제는 학생인권조례다'라고 지적하는 건 고민이 담긴 진단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정파적 판단에 따라 황급히 책임의 소재를 찾고 이를 떠넘긴 행위에 불과해 보인다.

사실 윤석열 정부와 여당의 이런 태도가 처음은 아니다. 이어진 폭우와 수해로 다수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충북 오송 지하차도 침수로 안타까운 희생이 발생한 이후, TV로 생중계된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뭐라고 발언했는가. '이권 카르텔, 부패 카르텔'의 '정치 보조금'을 전부 삭감하고 이를 수해 복구를 위한 재정으로 투입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업무 방기와 적대의 정치가 무서운 이유
 

윤석열 대통령이 방과후 돌봄·교육 프로그램인 '늘봄학교' 참관을 위해 지난해 7월 3일 경기도 수원초등학교를 방문, 책상에 앉아 추홍엽 교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대통령의 말에 화가 나기보다는 정말로 궁금증이 들었다. 저게 무슨 말일까. 무슨 의도와 맥락이 담긴 말일까. 대통령이 말하는 이권 카르텔과 부패 카르텔은 무엇이고 거기에 투입된 정치 보조금이란 무엇일까. 모든 걸 떠나 존재 여부도 불투명한 그 카르텔들을 무너뜨리고 정체 불명의 보조금을 삭감하면 매년 폭우로 반복되는 침수 문제가 해결이 될까. 특히나 기후 변화로 인해 반복되는 폭우와 침수는 이제는 예고된 재난에 가깝다. 그런데 왜 유독 작년과 올해 들어 인명 피해가 더욱 극심하게 기승을 부렸나.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 무조건 사과하고 자세를 낮추라는 게 아니다. 진단하지 않으면 이유를 알 수 없고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사고는 반복된다. 이 모든 게 부재하면 시민들은 불안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앞으로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하거나 혹은 이를 만들기 위한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사고가 발생했지만 책임을 다하려는 리더십을 보이지 않고 이를 떠넘기거나 비난할 대상을 찾기에 급급한 그야말로 '적대의 정치'라고 해도 다를 게 없는 지금의 행태는 그 자체로도 문제이다. 하지만 불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시간 우리는 상식과 원칙에서 벗어난 고위공직자나 정치인 몇 사람이 국가 체제와 정치 환경을 파괴하는 모습을 지켜봐왔다. 이건 한국만의 사례도 아니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일이 발생하면 일단 비난할 대상을 찾고 싶어 하는 건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심리이다. 그리고 지금 대통령실과 여당이 정확히 건드리는 게 이 부분이다. 말하자면 공직자들과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행태가 사회 전반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인내심 바닥나고 있다
 

리투아니아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과 폴란드·우크라이나 방문을 마친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준비한 수해 관련 자료를 살펴보며 대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사회적 참사나 구조적 비극의 원인이 모두 정부나 여당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무리 완벽한 제도를 추구해왔다고 해도 한계는 늘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 구조적 문제는 긴 시간 동안 누적되어온 것들이다. 현 정부를 지지하든 아니든 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내용이다. 참사와 사고 앞에서 정부와 여당이 책임을 통감하고 고개를 숙인다고 해도 무조건 그만두고 자리에서 나가라고 하지 않는 이유다.

보통은 공직자와 정치인들의 이런 태도를 충격과 두려움에 잠긴 시민들을 추스르고 위로하려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나아가 성찰적인 자세로 원인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모습을 보일 때 사람들의 불안은 잠재워질 수 있다. 하다못해 그게 형식적인 차원에서 그쳐 내용에 대한 비판이 있을 때도,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이나 여당인 국민의힘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특별히 강하게 지지하는 정당이 있는 것도 아니다. 늘 급변하길 반복하는 역동성을 지닌 한국의 정치 환경에선, 시대와 맥락에 따라 정치적 선택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부와 정당이라고 해서 그들이 망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유능하고 일을 잘해야 한다. 이들의 무능과 실패는 곧 국민인 나의 위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진 재난과 사고, 이로 인한 불안 속에서 정부와 여당은 일을 잘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조차 방기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이고 있다. 우리를 믿고 기대라는 최소한의 제스처조차도 없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부나 여당에 대한 호오의 문제가 아니라 위기감 때문에 이들을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지를 질문하게 된다. 불안감 속에서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고 있는 사람이 과연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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