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14 11:32최종 업데이트 23.08.1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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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로비가 주연을 받은 할리우드 영화 <바비> 스틸컷 ⓒ 워너브라더스


개봉 첫 주부터 반응이 심상치 않던 영화 <바비>가 결국 10억 달러(1조 3255억 원)의 수입을 거두는 기록을 세웠다. 완구업체인 마텔의 인형 바비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북미 제작 코미디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수입을 거둔 작품이 되었으며 감독인 그레타 거윅은 여성 연출자 최초로 소위 '10억 달러 클럽'에 입성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바비>가 2023년 최고의 흥행작이 될지를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다소 어리둥절할 것이다. 해외에 비하면 한국 극장가에서 <바비>가 거둔 성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는 이미 예견된 상황이라 생각한다. 영화 <바비>는 인형 브랜드 바비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인데, 한국은 '바비'라는 브랜드가 그리 큰 힘을 가진 나라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영화 <바비>로 인해 전 세계가 들썩이는 가운데 언뜻 보기에 의아한 글 하나를 발견했다. 미국의 방송사인 NBC의 홈페이지에 '영화 <바비>의 바비랜드가 성소수자 팬들이 기대한 만큼 '게이'하지는 않았다(Turns out, Barbieland isn't as gay as its queer fans had hoped)'는 제목의 글이 올라온 것.

기사를 살펴보니 영화 <바비>는 공개 전부터 성소수자 팬덤의 유별난 기대와 지지를 받았는데, 영화 속 '바비랜드'를 살펴보면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혹은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감독인 그레타 거윅이 한 성소수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성소수자 공동체의 참여 없이 이 영화의 이야기를 진행할 방법은 없었다'고 말한 걸 돌이켜 본다면 다소 의아한 상황이긴 하다.

성소수자 바비와 켄이 바비랜드에 없었던 이유
 

아메리카 페레라, 마고 로비 배우와 그레타 거윅 감독이 지난 7월 3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서 열린 영화 <바비>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 이정민


실제로 이런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닌듯하다. 가령 <퍼레이드> 매거진의 편집자인 매튜 허프는 앞서 언급한 기사에 인용된 인터뷰에서 영화 <바비>가 젠더 규범을 해체하고 다양성을 강조하는 만큼 공개적으로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했다면 좋았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배급사인 워너 브라더스와 바비 브랜드의 소유주인 마텔의 입김이 작용한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보다 직접적인 이유도 있다. <바비>의 주연이자 제작자이기도 한 마고 로비는 이번 영화에 '게이 켄'이 등장할 수도 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인형에게는 사실 성적 지향이 없어요."

언뜻 듣기에는 말이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아니 바비와 켄은 한 쌍의 이성애 커플처럼 보이는 너무나 인간 여성과 남성을 닮은 인형이 아닌가. 하지만 인형이 아무리 인간을 모사하고 재현한 것이라고 해도 결국 그들은 사람이 아니다. 바비랜드에 존재하는 인형들이 현실 세계의 인간과 똑같은 욕망 혹은 성적 끌림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아니 논리적으로 따지면 그 반대인 지금의 결과물이 훨씬 이치에 맞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대부분의 바비들과 켄들은 연애 관계를 형성하기는커녕 별다른 접점조차 형성하지 않는다.

'그 인형 게이 맞지?', 동료들과 이구동성으로 한 이야기
 

영화 <바비>에서 앨런 역을 맡은 마이클 세라 ⓒ 워너브라더스

 
그렇다고 영화 <바비>에 퀴어한 면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의 중반 현실세계에 나갔다가 가부장제를 알게 된 켄은 이를 바비랜드에 도입하고 그들이 사는 세상을 말 그대로 '켄의 제국(Kendom)'으로 바꾸어버린다. 바비랜드를 켄이 주축이 되는 세상으로 만들고 바비들에게는 켄에 종속된 보조자 역할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켄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남성형 인형이 있다. 바로 유일하게 다른 이름을 가진 인형인 앨런이다. 앨런은 켄이 형성한 마초적인 문화에도 잘 적응하지 못하고 바비들을 여자친구랍시고 수족처럼 부리는 일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중간에는 바비들 사이에 섞여 켄들의 수발을 들다 결국 탈출하려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리고 함께 영화를 보러 간 나와 동료들은 극장문을 나서자마자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앨런은 게이 같아,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야?"

이건 단순히 앨런이라는 캐릭터가 마초적인 남성 문화에 녹아들지 못하고 비교적 부드럽고 섬세한 모습을 보이는 등 게이에 대한 고정관념에 부합해서가 아니다(사실 그러기에 앨런은 다수의 켄들을 무찌를 만큼 싸움을 잘하기도 한다). 켄이 도입한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종속적인 위치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남성 우월적인 체제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체제는 남성과 여성의 파트너 관계만을 정상으로 두기에 이성애 중심적이다. 인형일지라도 그런 욕망을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앨런은 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앨런의 방황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수용한 남성 동성애자들이 가부장제 안에서 기득권 남성 집단에 완벽히 흡수되지 못하는 상황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만 영화가 퀴어해질 수 있는 것일까
     

영화 <바비> 스틸컷, 켄(라이언 고슬링 분)의 모습 ⓒ 워너브라더스

 
이 영화에 등장한 모든 인형들처럼 '앨런' 역시도 실제로 출시된 마텔 사의 인형 브랜드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1974년 출시 당시 마텔은 앨런이 켄의 친구라고 홍보했다. 하지만 현대의 소비자들은 상의를 탈의한 켄과 앨런이 나란히 서 있는 포장 박스의 이미지와 '켄의 모든 옷이 앨런에게 맞습니다'라는 홍보 문구를 심상치 않게 읽었다.

상의를 벗은 채 함께 어울리고 서로의 옷을 나눠 입었다는 앨런과 켄의 관계는 단순한 친구 관계 이상으로 독해하기 너무나 용이했다. 그리하여 앨런은 2020년대에 난데없이 게이 아이콘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실제로 앨런의 성적 지향이 어떻게 설정되어 있건 심지어 그게 있든 없든 말이다.

바비 브랜드를 퀴어하게 해석하는 게 앨런의 사례에서만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 디지털 크리에이터인 알렉스 아빌리아는 NBC와의 인터뷰에서 비록 마텔사가 광고하는 바비를 가지고는 특정한 놀이방식이 있겠지만, 사용자에 따라서는 짧은 머리의 바비를 만들거나 바비와 켄의 옷을 바꿔서 입히는 등 제작사가 의도하지 않은 퀴어함을 실현할 가능성은 늘 열려있다고 언급한다.

이와 비슷하게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연예인이자 '이상한 바비'를 맡은 배우 케이트 맥키넌은 이 영화는 결국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 상상력은 관객들의 깊은 욕망과 자신과 세상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 것들을 표현하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케이트 맥키넌이 맡은 '이상한 바비'는 어린 시절 아이들이 머리를 자르거나 낙서를 하는 등 '이상하게 꾸며버린 바비'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여성 연예인이자 '의사 바비' 역할을 맡은 하리 네프는 어린 시절 자신의 손끝에서 다양한 바비들이 탄생하는 걸 보며, 될 수 있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과 일을 탐색했다고 언급했다.

성소수자이며 바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브랜드의 슬로건인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영화 <바비>에도 분명 영향을 미쳤다. 특정 작품에서 성소수자의 존재가 전면에 등장하는 건 분명 필요한 일이다. 특히 대중매체에서 성소수자는 실제 존재에 비해 충분한 가시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의 작품이 반드시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만 퀴어해질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결국 영화의 의미를 완성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충분한 조건만 갖추어져 있다면 하나의 작품이 지닌 메시지와 의미, 요소 등 모든 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해서 다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영화 <바비>가 퀴어한 상상력의 가능성을 잠재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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