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7월 25일. 갑작스레 남편이 떠났다. 병원 침상에서였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30여 년 전에도 그녀는 남편의 병원 침상을 지키다 첫 남편을 먼저 보내야 했었다. 홀로 남은 30년은 먼저 보낸 두 사람을 전심을 다해 기리며 살아냈다. 천재 시인 이상과 천재 화가 김환기의 특이한 연결점. 두 분의 아내였던 고 김향안 여사의 이야기이다.
여름 열기보다 강렬했던 김향안의 삶
김향안이라는 이름에 다가서려 한 날들마다 하늘이 짙고 날이 뜨거웠다. 그분 생의 온도 같았다. 시인의 아내이자 화가의 아내라는 명칭 안에만 가둘 수 없는 분, 김향안은 본인 역시 여러 권의 수필집과 소설을 쓴 작가이자 화가였다.
화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아까워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던 그 작업실은 오늘도 한여름 볕을 가득 받고 있었다. 부부가 나란히 누운 자리를 찾았을 때도 그랬다.
유교의 전통도, 일제의 폭압도, 한국전의 화염도, 낯선 땅에서의 고단함도 김향안을 멈춰세우지 못했다. 그 동력이 무엇이었을까. 길을 걸으면서도, 묘소를 찾는 동안에도 내내 궁금했다.
변동림으로 태어나 김향안으로 활동했고 김동림으로 묻힌 여성. 두 예술가 남편으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신여성. 그들의 천재성을 꿰고 이끌어주었던 당찬 여성. 3개 국어에 능통해 이화여대와 소르본에서 수학할 정도로 영특했고, 현실에 충실했고, 예술가인 남편과 그의 작품을 영민하게 관리할 줄 알았던 여성. 김환기가 우주를 그려내었다면 김향안은 우주의 에너지를 품고 있었던 듯싶다.
"같이 멀리 달아날까? 아니면 같이 죽을까?"
드라마 대사 같은 구애였다. 이화여대생 변동림이었던 시절, 시인 이상의 강렬한 프러포즈에 그녀는 응했지만 결혼 4개월 만에 남편 이상은 혼자 멀리 떠나 혼자 죽었다. 일본 동경, 쓰러진 그에게 급히 달려가 병상을 지켰으나 어린 신부는 끝내 혼자 남겨졌다. 수년 후, 이번에는 연모의 마음을 편지로 써 보내오는 키 큰 화가가 나타났다. 김환기였다. 한 세기 전이었으니, 당시에 딸 셋을 둔 이혼남에게 젊은 딸을 시집 보낼 부모는 없었다. 매일매일 그저 편지로 마음을 전하는 김환기에게 변동림은 "자녀가 셋이든, 열이든, 거둬 키우겠다"라는 당찬 응답을 보냈다.
결혼을 반대하는 집도, 변동림이라는 이름도 내려놓았다. 대신 남편의 성과 남편의 아호를 달라 하여 가졌다. 그렇게 변동림은 김향안이 되었다. 두 편의 러브스토리를 묶으니 어떤 영화보다도 더 강렬한 로맨스 영화같다.
부부의 작업실을 찾아 가는 길
김환기, 향안 부부의 보금자리이자 작업실이었던 건물은 쉬이 찾을 수 있다. 바둑판처럼 가로세로로 교차하는 맨해튼 거리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유일한 대로가 브로드웨이다. 현란한 전광판의 타임스퀘어를 뒤로 하고 브로드웨이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오래된 지하철 역사 곁에 음악가 베르디 동상이 서 있다. 손바닥 만한 작은 공원, 베르디 스퀘어이다.
거기서 자연사 박물관 방향으로 몇 걸음 옮긴 곳에 셔먼 스퀘어 스튜디오가 있다(160W-73rd st.). 간혹 맞은편 베르디 스튜디오를 작업실로 잘못 소개하는 글을 본다. 록펠러 재단이 1년간 후원금과 함께 지원한 작업실은 셔먼 스퀘어 스튜디오 1층이었다. '환기 블루'라 불리는 진한 파랑 색감이 절정에 이르고 무수한 점들이 이어져 우주처럼 펼쳐지는 작품들이 탄생한 곳.
입주민이 있는 아파트라 출입은 허락되지 않지만, 1층 창 곁을 그저 천천히 걸었다. 고층보다는 햇빛이 덜 들었을 것이고 그 빛을 아까워하셨을 만하다. 아파트 주변은 예술가 부부에게 좋은 환경이었을 듯싶다. 거리의 양 끝으로 센트럴파크와 리버사이드파크가 가깝기 때문이다.
환갑이 넘은 노구에도 작품 수나 크기를 줄이지 않고 대작을 이어갔던 김환기. 허드슨 강변을 따라 길게 조성된 리버사이드 산책로를 그리 좋아하셨다한다. 강변에서야 작업을 하느라 온종일 숙이고 있던 목과 허리를 펼 수 있었을 것이다. 강변에서야 생업을 책임지느라 종일 고단했던 김향안의 몸과 마음도 쉴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서울대와 홍익대 교수였던 남편 곁에서 편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향안은 남편의 예술혼을 잘 알고 있었다. 먼저 파리로 가 수학하며 터를 일구고 남편을 불렀고, 뉴욕에서는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며 남편이 작업에 오롯이 몰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번에도 이별은 급하게 왔다. 뉴욕에 머문 지 10년 만이었다. 목과 허리를 구부린 채 하루 10시간을 넘게 작업을 이어갔던 탓에, 김환기는 목 디스크 판정을 받고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건강 회복을 위해 결정한 일이었는데, 그것이 뇌출혈로 이어지며 영영 이별이 되고 말았다.
그가 그려온 우주로, 그가 그리던 고향의 바다로 영면에 들었다. 남편을 묻고 홀로 지상에 머물던 김향안은 쉬지 않았다. 쉴 틈 없이 두 남편, 두 천재 예술가를 챙겼다. 이상의 시비를 세우고, 김환기의 작품을 정리해 저작권을 정비하고, 환기미술관을 설립했다. 먼저 간 두 사람의 이름에 한 점 흠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묘소를 찾아 가는 길
맨해튼 북쪽 켄시코 공원묘지(Kensico Cemetery)에는 여러 명사들의 무덤이 있다. 넓은 부지에 연못을 낀 고운 정원들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러시아의 음악가 라흐마니노프의 묘는 워낙 유명해 지도 앱에서 쉽게 검색된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김환기, 향안 부부의 묘소가 있다.
포칸티코 에비뉴(Pocantico Ave.)와 나라간세트 에비뉴(Narragansett Ave.)의 교차점에 MANVILLE이라 쓰인 영묘(건축물)가 좋은 지표가 되어준다. 영묘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언덕을 내려가듯 몇 개의 묘소를 지나면 잘 관리된 두 나무 사이에 김환기, 향안 부부의 묘비를 만날 수 있다.
묘비에는 수화 김환기와 김동림이라 새겨져 있다. 한평생 남편 바라기로 살며 온 힘을 다했으니 생의 마지막엔 태어난 당신의 이름 동림으로 쉬고 싶으셨을까. 묘비 앞에는 특별한 관리(special care)를 받는 곳임을 알리는 작은 표지가 꽂혀 있었다. 묘비 앞의 한 줌 잡초를 정리하려다 말고 그만 숙연해졌다.
예술가의 숙명이 그렇다지만, 예술가가 지상을 떠나고 나서야 우리는 남겨진 작품들을 사랑하고 열광한다. 한국 화단 최고가의 작품 10점 중 9점이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다. 음악팬들이 자주 방문한 흔적이 보이는 라흐마니노프 묘소를 지나와서인지, 김환기 부부의 묘비가 조금은 쓸쓸하게 느껴졌다. 지도 앱에 청원을 넣어 검색이 가능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쉽게 발걸음 할 수 있도록.
천재 시인 이상의 아내 변동림. 천재 화가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 그리고 김동림의 드라마틱한 삶은 뮤지컬로 그려져 관객과 만나고 있는 중이다. 김향안의 작품집 속에 있는 글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는 구절에서 제목을 가져온 <라흐 헤스트>(L'art reste)라는 창작 뮤지컬이다(9월 3일까지 드림아트센터 1관).
김향안은 갔지만 그의 시간은 예술처럼 남았다. 7월 25일은 김환기 화백의 기일이었다. 떠난 날을 기억한다는 듯, 뉴욕에는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