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몰러~'는 금지어, 매주 한번은 꼭 모이는 마을의 규칙> https://omn.kr/25fve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하늘과 가까운 마을, 높은 벼루
높은 벼루는 고당리 세 마을 중에서도 오지 마을로 가장 이목을 끄는 마을이다. 아찔한 경사의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야만 만날 수 있는 마을. 주택이 산비탈에 층층이 자리 잡고 있어 마치 아파트와도 같이 윗집, 아랫집이 존재하는 풍경이 무척 재미있다.
금강과 경부고속도로 금강4교가 저 멀리 내려다보이고 시야가 탁 트여 경치만 보고 있어도 속이 시원해지는 듯한 기분인데, 동시에 어떻게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됐을지 궁금해진다. 대를 이어 높은 벼루에 살아왔다는 진지용(64)씨에게 이곳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사셨지요. 저도 어떻게 옛날 어른들이 여기에 자리를 잡으셨을지 참 궁금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예상외로 고현 사람들은 꽤 부유한 편이었어요. 고당리 다른 마을 사람들에 비해 잘 먹었고 땅값도 이쪽이 더 비쌌지요. 여기에는 농사지을 땅이 마땅치 않아서 인근 마을의 땅을 일구기도 했는데, 근처 마을 상답은 다 고현 사람들 차지였다고 할 만큼 잘 사는 사람들이 꽤 많았어요."
높은 벼루가 지대는 높지만 햇빛이 잘 들고, 바람이 많지 않아 겨울에도 따뜻한 편이라는 사실 역시 놀라운 점이다. 진지용씨의 부모님은 과거 고현에서 유일했던 방앗간을 운영하기도 했다.
"집에 소가 많을 때는 세 마리까지 있었고 한때 머슴을 두었던 때도 있었지요. 방앗간은 이제 없고 그 자리에 오래된 탈곡기만 하나 남아 있네요."
높은 벼루는 옥천에서 가장 처음으로 슬레이트 지붕 개량 사업이 이루어진 마을이기도 한데, 그렇게 되기까지의 이유가 재미있다. 경부고속도로의 등장은 마을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경부고속도로 생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이 시찰을 나왔는데 우리 마을이 훤히 보였다는 거죠. 그때 눈에 띄어서 초가지붕이 온통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어요. 전기도 덕분에 일찍 들어왔지. 밤중에 마을 불빛을 보곤 당시 어떤 외국인들은 여기에 아파트가 있는 줄 알았다 하기도 그랬댔어요(웃음)."
고속도로를 지나며 산비탈에 자리한 높은 벼루 마을을 보고, 몇몇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고. "어떻게 이런 곳에 마을이 있느냐"며 궁금증을 가지고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을 지형 특성상 주민들만 아는 '해돋이 명소'도 있다. 높은 벼루 마을 뒤쪽 산꼭대기, 과거 서낭당이 있던 장소다. 건물은 사라진 지 오래돼 없지만, 팽나무와 말채나무가 그대로 남아 있다. 천문식 이장은 이곳이 "어린이들에게는 나무에 올라타 그네를 뛰며 놀던 장소이자 어른들이 더러 기도를 올리던 장소였다"면서 "이제 고당리 주민들에게 1월 1일 해돋이를 보는 장소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독특한 전통문화를 간직하다
옻샘마을(강촌)은 250년된 옻나무 아래 옻샘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옻나무가 자라기 최적의 환경을 갖춘 데다 옻나무도 많아 이를 생계 수단으로 살아온 주민들이 많았다. 옻오름의 위험이 있다지만 고당리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움 없이 옻나무를 다룰 수 있었다. 봄철이면 옻순을 따고, 겨울이면 나무줄기를 홈을 판 뒤 불에 그슬려(이를 '화칠'이라 부른다) 옻 진액을 얻었다. 이렇게 생산한 옻순·옻 진액은 심천장(영동), 옥천장 등으로 가져가 팔곤 했다.
"심천장은 높은 벼루 뒤 산길로 30리(12km)를 걸어가면 나오는 장인데 그나마 가장 가까운 장이었어요. 옻나무 만지는 일이 무척 고된 일이라지만, 그래도 마을에서 이것만큼 수익이 확실한 산업이 없었지요." (천문식 이장)
논 면적이 마을의 3%도 채 안 될 만큼 척박한 환경에서 옻나무는 고당리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던 것이다. 옻순은 그 맛을 아는 이들이 철이 되면 어김없이 찾았고, 옻 진액은 부인병, 혈액순환, 위장질환 등에 효능이 좋아 보신용으로 인기가 많았다.
옻샘마을에는 그러한 옻 산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귀촌한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박기영(65)씨다. 방송작가, 시인으로 활동해온 그는 아버지 대부터 옻을 연구해오다 어느 날 이곳과 인연이 닿았다. 그의 아버지가 대구에서 국내 최초 옻 전문 식당인 맹산식당을 운영해왔고 박기영씨는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 250년된 옻나무와 옻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고당리로 이주를 결심, 이곳에서 옻 산업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옻은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작물이지요. 옻순은 봄철 수확 기간에만 잠깐 맛볼 수 있는 별미이고, 옻 수액은 천연 보존제 역할을 해 각종 공예 분야에서 유용하게 활용됩니다. 화칠을 통해 얻어낸 옻 진액은 소화기와 속이 냉한 사람에게 좋아 특히 인기가 많습니다. 옛 제주도 해녀들이 물질을 할 때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옻진액을 많이 찾았다고 하지요. 점성이 높아서 보통 계란 흰자를 섞어 먹었습니다." (박기영씨)
그는 옻의 독성을 제거하는 방법 개발 등 옻 관련 다양한 특허기술을 바탕으로 2005년 옻 식품 가공업체를 설립(당시 ㈜참옻나무, 현재 ㈜참옻들)해 여러 옻 가공식품, 제품을 만들고 옥천이 전국 최초의 옻산업특구로 지정되기까지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옥천에서는 매년 봄 옥천참옻축제가 열리고 2016년 옻 효능을 체험할 수 있는 옻 문화단지가 생기기도 했다. 전국 옻 마니아들의 발길을 어느 정도 이끄는 데는 성공했다지만 넘어야 할 장애물은 많았다.
"옻 문화단지 관리가 부실하다는 평이 많았고, 시간이 흐르며 옻 산업특구 지정이 유명무실해진 게 컸지요. 옻 산업이 고당리에 도움이 돼야 할 텐데, 마을과의 연계가 아쉬운 지점이 많았습니다."
고당리가 이번 농촌현장포럼 사업에 신청한 것 역시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려는 목적도 있다. 옻 산업과 마을 발전을 연계하고 다시금 마을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것. 박기영씨는 이를 위해 전통문화의 보존과 체계화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고 이번 사업을 통해 옻 전통문화를 기록, 책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문화 산업은 결국 독창성이 경쟁력이지요. 용역을 통해 관습적인 결과물을 내놓는 것은 여기에 걸림돌이 된다고 봅니다. 그 지역만의 독특한 방식의 문화를 살려서 주민들이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산업이 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결과물이 나온다고 생각하죠. 그것을 위해 첫 번째로 할 일은 결국 그 전통문화를 잘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는 이번 저술 작업을 통해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고당리의 독특한 문화를 여럿 확인했다. 옻 뗏목을 만들어 나무를 운송하고 화칠 작업에 활용했던 것, 매년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해 섶다리를 만들던 문화 등이 그것. 이 외에도 고당리 10경, 석회암 동굴 등 비경 등 흥미로운 고당리에 대한 정보가 9월 발간 예정인 책에 함께 실릴 계획이다.
고당리가 고향인 천정봉(67)씨는 타지에서 40년간 나전칠기 가구를 만들어온 장인이다. 그의 아버지 역시 과거 고당리에서 관에 옻칠하는 작업을 업으로 삼아왔고 천정봉씨도 물론 화칠 작업을 직접 해 본 경험이 있다. 그는 섶다리 문화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가을, 겨울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서 섶다리를 만들었지요. 깊지 않은 여울이었지만, 겨울이 되면 건너기가 어려워지니까 힘을 합해서 만든 거예요. 저는 당시 어려서 직접 해본 적은 많지 않고 형님들과 어른들이 다리를 놓아줬는데, 나무 기둥을 세우면 소나무 잎과 모래, 그 위에 잔디 때를 입혀서 만드는 다리였어요.
비록 매년 여름 장마면 떠내려가는 바람에 다시 만들어야 했지만, 정성이 담긴 다리여서 그런지 참 정이 가고 따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다시 한번 마을 형님들과 그 다리를 만들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하죠."
이러한 기억과 공감이 앞으로 고당리의 풍경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 테다. 고당리는 농촌현장포럼에서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마을만들기 사업에 지원해 계획을 실제 추진해나갈 예정이다. 마을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한 고당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월간옥이네 통권 74호(2023년 8월호)
글‧사진 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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