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마지막 날 동생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9월부터 유류할증료가 오른다고 하니 내년에 유럽 여행을 갈 생각이 있으면 얼른 항공권을 예약하라고 했다. 여행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는 안식년의 계획에 여행을 제일 먼저 올리고, 틈만 나면 항공권 가격을 알아보고 여행 블로그를 찾아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세계 어느 곳 하나 궁금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특히 유럽은 23년 전 남편의 유학을 따라가 독일에서 3년간 살았던 추억이 있어 꼭 다시 한번 다녀오고 싶은 곳이다. 갈 곳도 많고 볼거리도 많은 유럽에 살았어도 기숙사 방 한 칸에서 아이까지 데리고 세 식구가 살던 유학 시절에는 여행은커녕 그저 남편의 공부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남편과 나중에 성공해서 꼭 다시 와보자고 약속했었다.
우스갯소리로 초밥 먹으러 일본에 가고, 쌀국수 먹으러 베트남에 다녀온다고 할 정도로 해외여행이 흔해진 요즘이지만, 나한테 해외여행은 몇 년 동안 벼르고 별러야 겨우 한번 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만만치 않은 여행경비 때문이었다. 외벌이 가정에서 아이들 교육시키고, 2년에 한 번씩 전세금 올려주며 살아야 했던 빠듯한 살림살이에서 여행을 위한 여윳돈을 마련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의환향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난한 유학 시절을 보냈던 그곳을 다시 찾아가 옛날 일들을 회상하며 둘러보고 싶은 '작은' 바람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걸 살면서 내내 깨달았다.
아무리 알뜰하게 살림을 해도 늘 수입과 지출은 자로 잰 듯 딱 맞아떨어졌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남들은 때가 되면 집을 사고, 또 때가 되면 차를 바꾸고, 철 따라 여행도 다니며 우리보다 훨씬 여유롭게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돈을 버는 능력도, 재테크로 돈을 불릴 수 있는 능력도 없는 나 자신의 무능함을 자책했다.
8월을 넘기지 않고 항공권을 예약하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어떤 루트로 여행할지, 또 기간은 얼마나 잡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고 무작정 항공사들의 예약사이트에 들어가 가격비교부터 시작했다.
내년 여름방학쯤을 생각하고 검색하니 조건이 괜찮은 항공권은 이미 많이 매진되어 있었다. 몇 백만 원이나 되는 항공권을, 그것도 일 년이나 전에 예약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니 사람들의 부지런함과 부유함이 놀라웠다.
유럽 지도를 펼쳐놓고 대강의 동선을 정한 후 도착지와 출발지를 정해 항공권을 골랐다. 딸아이와 함께 가기로 해서 항공권 두 장을 예약하는데, 요금이 384만 원이나 되었다. 마지막 결재 버튼을 누르려는데 좀처럼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생활비 카드로 결재를 하려니 남편 눈치가 보였다. 27년 동안 주부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 온 내 노고에 그 정도의 보상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살림살이가 그리 여유롭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고민스러웠다.
'결재하기'가 적혀 있는 파란색 버튼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의 비상금 통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틈틈이 시간제로 일을 하면서 조금씩 모아온 돈을 탈탈 털어보니 항공요금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활비로 할 것인가, 내 비상금으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결국 9월이 시작되기 50분 전에 내 카드번호를 입력했다.
화면이 뱅글뱅글 돌다가 '구매가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문자가 뜬 것을 보는 순간 통쾌함과 허탈함의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계획만 세우다가 번번히 포기해 버렸던 일을 드디어 저질렀다는 생각에 통쾌하면서도, 그동안 어렵게만 느껴졌던 일이 이렇게 쉽고 간단한 것이었나 하는 마음에 허탈했다.
출발 90일 전에는 수수료 없이 취소할 수 있다는 규정에 조금은 마음 편하게 결재를 했지만, 물건을 샀다가도 무르기 잘하는 내가 내년 여행을 정말로 갈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또, 항공요금의 몇 배에 달하는 여행 경비를 마련하는 것도 앞으로 해결해야 할 큰 숙제이고, 그 사이 혹시라도 연로하신 부모님들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9월 첫날 항공사 사이트에 다시 들어가 같은 노선의 항공요금을 검색해보니 대략 16만원 정도가 올라있었다. 그동안 마음에 위안이 되어주었던 나의 비상금이 날아가 버린 건 아쉽지만, 하루만에 16만 원을 벌었다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았다.
무엇보다 27년을 짠순이로 열심히 살아 온 내가 안식년에 나 자신을 위해서 통 크게 선물한 것 같아 뿌듯하다. 부디 내년에 무사히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가족과 지인들이 무탈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