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친정엄마가 바빠지셨다. 전화기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생기가 넘친다. 외출도 거의 안 하시고 집에서 TV 드라마 보는 게 유일한 취미인 엄마에게 생각지 못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 시작은 휴대폰 게임이었다. 무료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고 휴대폰에 게임을 깔아드렸더니 게임에 푹 빠지셔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고 계신다. 손가락 움직임이 둔해 스마트폰 조작을 어려워 하시던 엄마가 게임을 하시면서부터 휴대폰을 다루는 솜씨도 많이 능숙해지셨고, 휴대폰의 다른 기능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셨다.
글쓰기에 도전하는 친정엄마
통화의 목적으로만 사용하던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카톡을 주고받고, 문자와 사진을 전송하는 것까지, 새로운 기능들을 하나하나 배우면서 신기해 하셨다. 덕분에 시도때도 없이 휴대폰 사용 방법을 물어오시고, 나는 같은 설명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고 있다.
요금이 비싸고 사용방법도 어렵다고 스마트폰으로 바꾸는 걸 한사코 마다 하시더니 이제는 손에서 놓지를 않으신다. 스마트폰이 익숙해지고 게임을 잘한다고 자식들에게 칭찬까지 받으니 활력이 생기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볼 용기도 생기셨던 모양이다.
"네가 저번에 써보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글을 써봤는데..."
지난 겨울 빙판길에 넘어져 다리를 다치신 엄마를 보살펴 드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엄마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 이야기를 글로 써보시라고 권했었다.
내가 글을 쓰면서 초라하게만 느껴졌던 나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다독일 수 있었던 것처럼 몸과 마음이 많이 약해지신 엄마도 위안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엄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그냥 웃어 넘기셨다.
전쟁통에 고아가 되어 학교도 거의 다니지 못하셨던 엄마는 늘 못 배운 것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사셨다. 엄마 표현을 빌리자면, 무식한 게 탄로날까 봐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이 늘 조심스러우셨단다. 그런 엄마에게 글을 써보라는 건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던 것이다.
"에이, 글은 배운 사람들이나 쓰는 거지. 나 같은 사람이 무슨 글을 쓰냐?"
그랬던 엄마가 정말로 글을 쓰셨다니 신기했다. 내 블로그에 엄마의 어린 시절에 대해 썼던 글을 읽어드렸더니 마음이 움직이셨던 모양이다. 새벽에 일찍 잠에서 깬 어느 날, 달력을 한 장 뜯어 사등분으로 접어 뒷면에 글을 쓰기 시작하셨단다.
글을 어떻게 쓰냐 하시던 엄마가 달력을 한 장 꽉 채우는데 30분도 채 안 걸렸단다. 대강 들어보니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엄마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한 장의 달력에 그야말로 요약을 해 놓으신 것 같았다.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은 노트
엄마의 글이 너무 궁금했다. 마침 엄마의 생신이 얼마 남지 않아 선물로 칸이 넓은 노트와 필기감이 좋은 삼색 볼펜 그리고 필통을 준비했다. 또, 소일거리로 하실 만한 컬러링북과 색연필도 샀다. 그동안은 매번 비슷하게 옷이나 건강 식품을 주로 사드렸는데, 처음으로 노트와 필기구를 선물로 드리려니 내 마음까지 설렜다.
생신날, 친정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의 글부터 찾았다. 달력 뒷면에 쓰셨던 글을 집안에 굴러다니던 낡은 노트에 다시 옮겨 써놓으셨다.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맞지 않는 글이었지만, 노트 세 페이지를 꽉 채운 엄마의 글에는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만하면 어린 나이에 이북에서 혼자 나와 출세한 거 아닌가.
마지막 문장을 읽는데 코끝이 시큰했다. 엄마에게 글쓰기를 권할 때 꼭 느끼셨으면 하는 마음을 그대로 담아놓으셨다. "그동안 잘 살아오셨습니다." 내가 해드리고 싶었던 말을 엄마가 스스로 찾으신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엄마는 이후에도 큰딸 이야기며 아들 이야기, 가족들 이야기를 차례로 쓰고 계신다. 사실만 담겨있던 글에 점점 마음을 담아가고 있으시다. 글을 쓰시면서 지나온 인생을 차분히 돌아보고, 지금의 자신을 위로하고 계시는 듯 하다.
환갑이 다 된 자식들을 보면 나는 살만치 산 것 같은데 왜 삶에 미련이 남을까. 힘겹게 살다 지금은 아무 걱정없이 살다보니 삶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몸은 자꾸 아프고 망가져 가는데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니 참 서글프다. 지금부터라도 미련을 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다가자.
나는 엄마 계정으로 블로그를 만들어 엄마가 쓰신 글들을 그대로 옮겨 드리고 있다. 곧 엄마가 직접 블로그에 글을 쓰실 수 있도록 가르쳐 드릴 생각이다. 또 엄마가 흥미를 느끼실 만한 새로운 일들도 계속 찾아볼 생각이다.
엄마 나이 벌써 여든 넷! 마음이 급하다. 내 아이들 키우느라 그동안은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10년만 일찍 시작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남는다. 엄마가 글을 쓰실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스토리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