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1 11:56최종 업데이트 23.09.1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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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시의 정책 및 전략 계획 책임자(Director of Policy & Strategic Initiatives) 킴벌리 로든이 지난 8월 29일 보스턴시가 더 이상 혼인신고시 성별이나 성별 정체성을 등록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보스턴TV 유튜브 캡처

 
최근 미국 보스턴에서 혼인 신고와 관련한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바로 혼인신고서에서 결혼하는 부부의 성별이나 성별정체성을 입력하는 항목을 없애버린 것이다.

아마 한국인들에겐 이런 조치가 다소 의아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인신고서를 작성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한국에는 이미 성별을 기재하는 별도의 항목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혼인신고서는 신고자를 '남편'과 '아내'라는 성별 이분법적인 의도가 다분한 방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혼인신고서에는 주민등록번호를 적는 칸도 있는데, 성별에 따라 특정한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되는 한국에서 이를 드러내는 건 성별을 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의식했건 하지 못했건 간에 한국의 혼인신고서에도 성별을 입력하는 항목은 존재해 온 셈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질문할지 모른다. 도대체 혼인신고서에서 성별을 적는 칸을 없애는 게 무슨 의미일까. 그 칸을 없앤다고 달라지는 건 무엇인가. 혹시나 성별을 이유로 결혼에 있어 차별받는 사람을 만들지 않기 위한 조치일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동성 부부들이 주장하는 혼인 평등 이슈에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도 의문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이 문제 또한 혼인신고서에 같은 성별을 적어도 접수가 가능하게 하면 해결될 일이기 때문이다. 굳이 양식을 뜯어고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보스턴시의 조치를 설명하는 데는 보다 긴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선 세상에는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되지 않는 성별도 있다는 것부터 시작하자.

이분법적 성별 구분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논 바이너리

사람들은 흔히 성별이란 자연적이며 타고나는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성별은 다른 사회적 정체성처럼 사람을 구분하는 분류 체계일 뿐이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이 사회가 우리를 '여성' 혹은 '남성' 지정하기에 그 성별로 살아간다.

그리고 사회가 지정해주는 성별이 둘 뿐임으로 그 구분은 또한 이분법적이다. 성별이란 타고난 불변의 것이란 고정관념이 너무나 강하기에 이 설명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별을 우리가 사는 사회와 다른 방식으로 분류하는 곳도 있음을 생각해 보자.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부기스족은 성별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고 북미 선주민들에게는 성별과 성적지향이 유동적인 이들을 일컫는 '2개의 영혼'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또한 지정 받은 성별과 실제 성별정체성이 다른 트랜스젠더의 존재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다.

즉 분류하고 부여하는 방식이 변하면 성별의 내용 또한 달라진다. 이는 성별이 자연적이거나 타고난 게 아님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성과 남성이라는 지금 사회의 이분법적 성별 분류가 맞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이런 이들이 지칭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논 바이너리(non-binary)이다.

여기서 바이너리는 이분법을 뜻하는 단어로 그 앞에 부정형 접두사인 논(non)이 붙으면 이분법을 벗어난 혹은 이를 통해 분류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가 아는 유명 인사들 중에서도 논 바이너리인 사람이 있다. 가령 게임 원작 드라마인 '더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주인공 엘리 역할을 맡은 배우 벨라 램지도 논 바이너리 정체성에 속하는 젠더 플루이드(성별 정체성이 유동적인 사람을 일컫는 말)임을 밝힌 바 있다.

이분법적인 성별 구분을 벗어나자 비로소 알게 된 것들
 

영화 <캐서린 콜드 버디>에 출연한 벨라 램지의 모습 ⓒ 왓챠


그런데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배우 벨라 램지가 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에서 최고의 젊은 연기자(Best Young Performer)라는 부문의 후보로 선정된 후, 램지는 성별 중립적인 부분의 수상 후보로 오를 수 있어서 기쁘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인터뷰를 읽은 후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왜 여러 시상식에서는 성별에 따라 후보를 정하고 상을 줄까. 왜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을 나눠서 줄까. 만약 출중한 연기력을 지닌 논 바이너리인 예술인이 있다면 이 시상식은 그 사람을 어떤 부문에 올릴까. 이분법적인 성별 분류에 따른 부분 어느 한 곳에 후보로 올라 상을 탄다고 해도 논 바이너리인 사람이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까?

이제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보스턴시는 앞으로 혼인신고를 할 때 신고자의 성별도 성별 정체성도 묻지 않기로 했다. 이 조치를 이끈 사람은 보스턴의 정책 및 전략 계획 책임자인 킴벌리 로든이다. 그리고 로든은 논 바이너리 당사자이기도 하다.

킴벌리 로든은 결혼을 한 이후 자신의 성별이 이분법의 어느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로든의 혼인 증명서에는 본인의 성별정체성과 일치하지 않는 성별이 기재되어 있었다. 새로운 혼인 신고 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킴벌리 로든은 성별이 기재되지 않은 새로운 혼인 증명서를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혼인증명서는 더 이상 우리를 구속하지 않으며 편견 없이 우리가 가진 사랑을 반영합니다."

평등을 향한 길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을 수도 있다
 

킴벌리 로든이 폴 정(Paul Chong) '시 등록관'으로부터 보스턴 최초의 성별 표시 없는 결혼 증명서를 수여받고 기뻐하고 있다. ⓒ 보스턴TV 유튜브 캡처


해당 기자회견에서 킴벌리 로든은 혼인신고서의 협소한 성별 선택란이 이 도시가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함을 드러냈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보스턴시의 시장인 미셸 우는 이번 변화가 공공 서비스 영역에 있어서 다양한 성별 정체성을 아우르고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원칙과 가이드를 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임을 강조했다.

실제로 로든은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혼인신고의 도입이 단지 성소수자 공동체의 승리만이 아님을 강조했다. 로든은 이 조치가 평등하게 공공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원칙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승리라고 평했다.

나는 이러한 평가가 보스턴시가 내린 조치의 핵심을 짚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낯선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만났을 때, 거부감까지 보이지 않지만 굳이 세상에 그런 걸 알려야 하냐고 묻는다. 누군가가 동성애자이건 논 바이너리건 그냥 자기들끼리 조용히 살아가면 되지 왜 사회가 자신을 알아달라 하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에 이 말은 맞을 수 있지만 사회적 소수자들은 사정이 다르다.

공공 서비스부터 시작해 이 사회의 모든 영역이 소수자의 존재를 모른 채로 설계되었을 때, 이들이 배제되거나 차별받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누군가의 존재를 정확히 인식하고 혼인신고서에서 항목 하나를 삭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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