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5 09:45최종 업데이트 23.09.25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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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딕셔너리 닷컴은 아말가젠더(amalgagender)나 폴리섹슈얼(polysexual)을 사전에 등재했다. ⓒ 딕셔너리닷컴 홈페이지 캡처

 
이달 초 미국의 인터넷 사전 서비스인 딕셔너리 닷컴은 566개의 새로운 단어가 사전에 추가되었다고 공지했다. 대중문화와 최근 각광 받는 분야인 인공지능 관련 신조어들이 새롭게 추가되었고 더불어 성적 지향 및 성별정체성과 관련된 단어들도 목록에 포함되었다.

아말가젠더(amalgagender)나 폴리섹슈얼(polysexual)과 같은 단어들이 대표적이다. 낯선 단어들이지만 막상 설명을 들으면 이해하기가 크게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세상에는 여성 혹은 남성의 것이라 규정된 몸으로 태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염색체, 생식샘, 성호르몬, 성기 등이 기성의 이분법적 성별 분류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 양극단으로 구분되는 성별 분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몸으로 태어난 사람들 말이다.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간성 혹은 인터섹스(intersex)라고 부른다.

전형적인 성별이분법에 들어맞지 않는 몸으로 태어났기에 인터섹스인 사람들은 삶의 초기부터 차별과 낙인에 시달리며 살아가곤 한다. 심지어 태어남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과 수술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성별이분법에 들어맞는 몸을 만들겠다는 명목 아래에서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자. 여성과 남성, 기성의 성별 구분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몸으로 살아가는 삶이 그 사람의 성별정체성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물론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성별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터섹스 당사자도 있겠지만 간성이라는 삶의 조건이 성별정체성에 영향을 미친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아말가젠더는 바로 이런 성별정체성을 지칭하는 단어다. 인터섹스임에 영향을 받거나 혹은 연관된 성별정체성이 바로 아말가젠더이다.

변화하는 시대, 이에 발을 맞추는 사전
 

새로운 말이 등장하는 것에 따라 사전도 변화한다. ⓒ pxhere

 
아말가젠더가 성별정체성에 대한 단어라면 폴리섹슈얼은 성적 지향과 관련된 용어다. 이 단어는 다양한 성별의 사람들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이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성적 지향과 관련된 단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질문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판섹슈얼(Pansexual)과 폴리섹슈얼의 다른 점은 무엇이지?

일단 판섹슈얼은 모든 성별의 사람이나 혹은 성별에 관계없이 성적이거나 감정적 끌림을 느끼는 이들을 뜻한다. 하지만 폴리섹슈얼은 성적 끌림을 느끼는 성별이 특정되어 있으며 그게 다수라는 차이가 있다. 즉 폴리섹슈얼인 사람들에게는 끌림을 느끼지 못하는 성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판섹슈얼은 한국어로 '범성애(凡性愛)'라고 번역된다. 폴리섹슈얼을 옮겨보자면 아마 '다성애(多性愛)'로 번역될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낯선 이 단어들을 사전에 등재된 것이 사전 제작자들이 성소수자 친화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들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딕셔너리 닷컴의 편집 부사장인 존 켈리는 미국 <엔비시뉴스(NBC News)>와 한 인터뷰에서 하나의 단어를 사전에 추가할 때는 자체적인 네 가지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해당 단어가 널리 사용되는가, 공유된 의미가 있는가, 지속력을 입증 하는가, 대중들에게 유용한 개념인가'가 바로 그 기준들이다.

또한 켈리에 따르면 성별정체성 및 성적 지향과 관련된 단어들은 지난 15년 동안 특히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언급했다. 즉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말이 등장하거나 혹은 기존의 의미가 변화하면서 사전을 만드는 사람도 이를 반영한 셈이다.

성별이분법을 넘어서자, 언어도 달라졌다

새로운 단어를 추가하면서 딕셔너리 닷컴은 기존에 등재된 단어들의 정의를 바꾸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수백 개의 단어 정의에서 성별을 지칭하는 단어가 삭제되었다. 예를 들어 자원봉사자라는 단어는 한국어로 다소 거칠게 옮기자면 '스스로 자원하여 일하기를 제안하는 남성 혹은 여성'이라고 정의되어 있었다. 그리고 딕셔너리 닷컴은 이 정의를 '스스로 자원하여 일하기를 제안하는 사람'으로 수정했다.

최근 영미권에서는 자신의 성별대명사를 직접 지정하거나 혹은 성별중립적인 대명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영어 문장은 성별대명사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회가 인식하는 성별과 실제의 성별정체성이 일치하지 않거나 혹은 '그녀(she)', '그(he)'와 같이 기존의 이분법적 성별대명사로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딕셔너리 닷컴의 개정은 이런 추세를 따른 것일까.

어느 정도는 맞고 또 어느 정도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개정된 내용은 사회적 추세를 반영한 것도 맞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기존의 정의로는 더 이상 단어를 효율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 켈리는 이에 대해 우리들 중 누구도 '스스로 자원하여 일하기를 제안하는 남성 혹은 여성'을 찾고 있다는 의미로 '자원봉사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살아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자원봉사자를 성별대명사를 이용해 설명하면 '사람'으로 설명할 때보다 의미가 축소되며 읽기도 이해하기도 더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켈리는 불필요하게 성별대명사를 이용하여 단어를 정의하는 방식은 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번거롭기까지 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사회적 변화를 고려하면 이번 개정이 이미 시한을 넘어서 이루어진 것이라 언급했다.

원칙과 기준에 따라 일을 한다는 것
 

국립국어원 전경 ⓒ 김병기

 
세상에는 다양한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성애 중심적이거나 이분법적인 성별 분류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거나 존재를 무시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이에 맞서 성소수자에게도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입장을 밝히고 나서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원칙과 기준에 따라 자기 일을 충분히 해내는 것만으로도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배제를 없앨 수도 있다. 딕셔너리 닷컴이 사전의 기능과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새로운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추가하고 성별이분법적인 기존의 정의들을 대폭 수정한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한때 국립국어원의 '사랑'의 정의를 놓고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2012년 11월 국립국어원은 표준국어대사전 속 '사랑'의 정의를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에서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개정했다.

이는 기존의 '사랑'의 정의가 이성애 중심적이며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보수개신교계를 중심으로 이러한 변화가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반발이 일었고 결국 국립국어원은 '사랑'의 항목 네 번째에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는 설명을 슬그머니 추가했다. 그리고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정의는 유지되고 있다. 차별에 반대하고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는 시민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차치하고서라도 과연 이들이 전문가답게 일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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