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에서는 티비를 많이 볼 수가 없었고 채널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주로 내 친구의 집에서 온종일 티비를 보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티비에 나오는 만화들을 따라하고 친구집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해가 질 때까지 매일매일 놀자 우리집에서는 '그 집 딸 해라' 할 정도였다. 그 중 우리가 제일 많이 봤던 것은 케이블 티비가 안 나오던 우리집에선 볼 수 없었던 <톰과 제리>였다.
내 또래 20,30대 중에 어릴 때 <톰과 제리> 한 편도 안 보고 자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순 슬랩스틱으로 이루어진 그 애니메이션은 싫어하는 어린이가 아무도 없던 만인의 사랑이었다.
미련한 고양이 톰과 얄미운 쥐 제리의 추격전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이 <톰과 제리> 시리즈는 워낙 옛날부터 인기가 있어, 90년대부터 지금까지 관련 문구를 구할 수 있는 아이들 중 하나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의 운동회
한편, 나는 오늘 시골 중학교 총동창회 겸 체육대회에 와 있다. 내가 졸업한 중학교는 아니다. 일주일 전 나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평일에 직장을 다니는 친구였지만 평소 워낙 성실하고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편이라 주말 알바를 하자는 게 놀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뭐하는 건데?" 하고 물었고, 친구는 체육대회에 가는 거라고 말했다. 체육대회에 가는 알바라니. 도대체 뭘까? 궁금했지만 아마도 청소나 음식 나르기 등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나는 가겠다고 했다.
내가 갈 학교는 나의 고향 시골 마을, 그 중에서도 더 시골인 면에 있는 한 중학교였다. 도착해보니 각 부스별로 8기, 9기부터 15기까지 기수별로 어른들이 몇 분 앉아계셨다. 너무 무례한 생각이지만 나는 "이렇게 어른들이신데 어떻게 체육대회를 한다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의 어릴 적 체육대회를 떠올렸다. 나는 체육대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어린이였다. 한 가지를 특별히 싫어했는데 하나는 반 전체 달리기였다. 나는 꽤 느린 어린이였기 때문에 5명이 달리면 거의 4등 아니면 운 좋으면 3등이었다.
각 등수별로 상품을 주기 위해 하는 경기였기 때문에 어른들 기준에선 나쁠 것 없는 경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1등이 아닌 상황이 낙인 찍히는 그 경기가 너무 싫었다.
한편, 선물은 다른 학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학교는 그냥 1등은 공책 10권, 2등은 공책 5권, 3등은 공책 3권, 4등은 공책 1권, 5등은 연필 한 자루였다(지금 생각해보니 연필 한 자루는 너무 짜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그 해의 체육대회에서도 나는 운동장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다른 떄와 달리 웃는 얼굴이었다. 내 옆에 다른 반이지만 내가 유치원 때부터 친했던 친구가 함께 뛰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늘 티비를 신세지던 <톰과 제리> 친구였다. 친구는 몸이 약해 달리기를 잘 하지 못했지만 뭐든지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
"탕!"
총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날리며 아이들이 우다다 달려갔다. 나도 앞 친구들을 따라 달리고 운동장의 커브 부분을 돌았을 쯤, 아직 내 뒤에 있는 내 친구가 보였다. 느렸지만 죽을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그때 왜 그랬는지, 나는 달리는 척을 했다. 친구가 내 옆에 올 때까지 걷는 것보다 늦은 속도로 달리는 시늉을 했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보다 더 현명한 방법이 있었을 것 같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으로 느껴졌다. 마치 바보같은 고양이 톰처럼 런닝머신 위인 줄도 모르고 달리는 것처럼 느릿느릿 우스운 모습으로 달린 것이다. 그리고 친구가 내 옆까지 왔을 때 나는 다시 달려 친구와 같이 결승선에 들어갔다. 등수는 나란히 꼴등.
5등 도장을 받으러 친구와 함께 선생님께 갔을 때, 선생님은 우리 손등에 4등 도장을 찍어주셨다. 우리는 공책 1권씩을 사이좋게 받을 수 있었다. 5등은 2명 모자라고, 4등은 2명 많은 이상한 달리기였다.
코미디같은 상황이었고, 다른 아이들에게 많이 놀림을 받았지만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달리기이다. 내 친구만은 나를 놀리지 않았고, 또 <톰과 제리> 공책 1권씩을, 친구와 함께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고전문구 탐방 중 그 공책을 만났을 때, 내가 반가워 눈물을 흘린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중학생으로 돌아간 듯한 어른들
"야, 우리 이제 밥 먹고 다른 분들 밥 먹은 거 치우면 된대. 그러고 나서 이어달리기 한대."
친구는 일정표를 내밀며 말했다. 우리는 서둘러 밥을 먹고, 정신없이 정리를 했다. 곧 잔뜩 모인 어른들 사이에서 수십 개의 술병과 담배, 음식들이 나와 눈코뜰새 없이 쓰레기를 치웠다.
곧이어 중학교의 이어달리기가 시작되자, 우리 엄마 아빠처럼 점잖게 앉아계시던 어른들이 신발끈을 고쳐 묶고, 바지를 갈아 입으며, 신발을 갈아신는 건 반칙 아니냐며 서로 장난스레 손가락질을 했다.
수십년 째 어른으로 있던 사람들이 다시 중학생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뭔가 뭉클했다. 마음 속에 있던 어린이들이 친구들을 만나 깨어나는 모습이었달까.
이어달리기가 시작되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온 힘을 다해 달렸고, 끝나고 누구는 일등이네, 누구는 꼴등이네 하며 놀리다가 발길질을 당하는 모습까지 중학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저 중에 누군가는 서로 앙숙이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절친이고, 또 누군가는 나와 나의 친구처럼 추억의 만화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품은 사과랑 쌀로 바뀌기는 했지만 그 모습은 나의 어린 시절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꼴등을 하기 싫은 그 마음까지도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늙지 않는다."
- 영화<쎄시봉> 中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대사인데, 정말 그대로이다. 단순히 일당을 벌러 온 내가 변하지 않은 어른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큰 복이었다. 왠지 흐뭇해지는 그 풍경에 나는 옆에서 같이 쓰레기를 치우는 친구에게 묻고 싶어졌다.
"야, 너 우리 4등 했던 거 생각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