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가에는 비가 오는 새벽이면 '그' 소리에 눈이 번쩍 뜨이곤 한다. 집 주위를 가득 채운 개구리의 개굴개굴골골골 울음 소리이다. 어릴 때 그 소리가 들릴 때면 나는 내 샌들을 들어다가 마루 밑 깊숙히 넣어두곤 했다. 개구리가 내 신발에 붙을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6살 무렵 신발에 붙은 청개구리를 못 보고 슬리퍼를 신으려다 기겁을 하고 난 이후부터 나는 개구리를 무서워한다. 다행히 밟지는 않았지만 발바닥에 느껴지는 그 미끈하고 축축한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무서워할 뿐만 아니라 개구리를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외가에서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먹고 얘기를 나눌 때, 늘 나오던 개구리에 대한 얘기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꼭 내가 주인공이 되라는 법은 없지만 엄마는 개구리 소리를 들으면서 꼭 내 남동생이 개구리를 보고 어렸을 때 놀라서 개구리를 못 본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나도 개구리 무서워 해!" 하고 몇 번이고 얘기했지만 동생을 따라한다고 여겼을 뿐 내 얘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이해가 간다. 나는 어지간해서는 무서운 게 없는 초등학생이었고, 고집쟁이 둘째 딸이었기 때문에 엄마가 보시기에 내가 개구리를 무서워 한다는 것은 남동생에 대한 질투로 보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점에 정말로 질투를 했다. 꼭 나만 관심을 못 받는 것 같았다.
실제로 남동생이 개구리를 무서워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남동생은 개구리 뿐만 아니라 강아지, 고양이, 잠자리, 매미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겁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그런 남동생을 보호해주는 것이 어릴 때는 너무 질투가 났었다.
개구리를 싫어하는데
하지만 개구리를 무서워하는 그 마음만큼은 질투가 아닌 진심이었다. 실제로 나는 유난스럽기는 하지만 아직도 입체로 된 개구리 모형을 잘 보지 못하고 개구리 해부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내가 볼 수 있는 개구리는 평면에 있는 그려진 개구리, 즉 캐릭터화 된 개구리이고, 그 중에서도 개구리의 특징이 거의 지워진 것들이다.
그런 내가 어른이 되고 고전문구 수집을 막 시작했을 때, 내가 만난 개골구리는 당연히 내 관심 밖이었고, 마음속으로 징그럽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개구리가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된 얼굴은 아니었지만, 이 세상에 떠버기, 키디, 체리펫, 둘리가 있는데 개골구리에 관심이 갈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개골구리 물건은 전혀 수집하지 않은 채로 몇 년이 지나고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러다 이 동네에 오래된 바른손(개골구리, 떠버기 제작 회사) 매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핌핌(바른손 꼬마또래의 토끼 캐릭터 차후 기사로 작성하도록 하겠다)에 한창 빠져 있던 나는 바로 매장에 방문했다. 오래된 매장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상품들과 아주 오래된 상품이 뒤섞여 있는 아주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한참을 살피며 이것저것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으니 사장님께서 창고에 가면 물건이 더 있다고 안내를 해주셨다. 운 좋게 창고를 구경할 수가 있었다. 창고에는 먼지 쌓인 노트와 훼손된 가방들, 사장님의 살림도구 일부와 빨간 바지를 입은 개골구리 인형이 있었다.
나는 정말 놀랐다. 왜냐하면 인형류들은 남아 있는 경우가, 특히나 창고에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개골구리는 거의 메인 캐릭터라고 생각을 해 왔는데 이토록 상태가 좋은 개골구리가 창고에 살다니. 그토록 관심이 없던 개골구리였지만 날 보고 윙크를 하고 있는 그 인형을 나는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더이상 질투가 나지 않는다
그러고나선 매일 후회했다. 계속 위치와 자세를 바꿔가며 개골구리를 신경썼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 집에 싫어하는 것이 들어온 건 처음이라 싫어하는 티가 나지 않게 꼭 좋아하는 것처럼 어떻게 놓아야 괜찮나 매일 고민해 본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어이없게도 어느새 신기하게 그냥 좋아졌다.
그렇게 개골구리는 내가 싫어하지 않는 개구리가 되었다. 개구리라는 이유만으로 예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었던 게 꼭 나같기도 하고, 여전히 너무 예쁜 건 아니지만. 우연히 만나 나의 심리적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고 씩씩하게 웃고 있는 이 개구리를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배웠다. 마음 속으로 가지고 있는 조그만 편견을 이겨내는 것은 결국 반복된 사랑과 관심이 아닐까 하는 것을.
올해 초 우리 가족은 포항 스페이스워크에 갔다. 일명 롤러코스터 다리라고 불리는 그곳은 아슬아슬하게 휘어진 계단을 난간에 의지해 오르내리는 관광지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인생 최대의 공포를 맛봤다. 내가 높은 곳을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나조차도 처음 알았다.
가족 중 가장 덜덜 떨며 겨우 내려온 나를 보고 엄마는 "이렇게 무서워 하는 거 처음 봤네, 높은 거 무서워 하는지 처음 알았다. 기억해둬야겠네"라고 말했다. 그 말에 왜 눈물이 핑 돌던지. 그래. 질투를 걷어내고 보면 보인다. 엄마의 작은 편견 뒤에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있다는 것이. 지금은 내가 개구리를 무서워 한다는 걸 기억해주지 않아도 질투가 나지 않는다.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