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이야기 담당 편집기자로 일하며 더 좋은 제목이 없을까 매일 고민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더 돋보이게 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 편집기자의 도움 없이도 '죽이는 제목'을 뽑을 수 있도록 사심 담아 쓰는 본격 제목 에세이. [편집자말] |
편집기자가 팀장이 되면 후배가 편집한 원고를 '데스킹'한다. 글 한 편을 독자에게 선보이기 전에 편집의 완성도와 제목, 사진, 본문 중제 등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때 제목을 다시 뽑아보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 제목 한 문장을 읽었을 때 직관적으로 궁금한 마음이 들지 않거나, 재밌다고 느껴지지 않거나, 너무 착한 문장, 그러니까 공자님 말씀 같거나 등등의 이유가 생겼을 때. 그러고 나면 가끔씩 예전 일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내가 막 입사해서 편집 일을 배울 무렵 말이다.
제목을 몇 개씩 뽑아보라는 요청
K 선배가 있었다. 그때는 회사에서 선배들이 부르기만 하면 그것이 무슨 일이든지 간에 긴장지수가 급격히 치솟았다. 특히 K 선배가 부르면 뭔가 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땀부터 났다.
제목을 정할 때도 그랬다. 내 딴에는 열심히 제목을 고심해서 보냈는데 선배가 '보시기에' 별로였을 때(아마도 저 위에서 언급한 그런 이유에서 였으리라) 대번에 이런 말이 들려왔다. "이 제목으로 얼마나 보겠니... 이런 거 말고 제목 다시 뽑아 봐."
그 순간부터 내 안에는 작은 폭풍우가 일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돛 하나가 전부인 뗏목. 이걸 타고 어떻게든 선배가 원하는 문장 앞으로 가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내 문장이 제목이 될 수 없는' 경우의 수를 최대한 줄여야 했다.
그래서 나는 번번이 싸웠다. 누구랑? 선배랑? 그건 전혀 아니고 나랑. 내가 뽑은 제목의 수만큼이나 그게 제목이 될 수 없는 이런저런 이유가 맞붙어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는 설전을 벌이곤 했다.
최종적으로 제목을 정하는 과정에서 "선배는 어떻게 이런 제목을 생각하지? 선배는 되는 게 왜 나는 안 되지?" 싶을 때는 아주 많았고, 가끔은 선배가 뽑은 제목이지만 내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또는 나는 동의할 수 없는 제목이지만 '에라 모르겠다, 시키는 대로 하자'라고 넘어갈 때도 있었고.
해도 해도 선배 마음에 드는 제목이 안 나오면 대놓고 묻기도 했다. "그래서 선배, 어디 부분을 중심으로 제목을 뽑으면 좋을 것 같아요?" 범위라도 알려주면 덜 헤맬 것 같아서(엉엉). 봐야 할 기사는 많고 제목을 더 뽑을 마음의 여유가 없는데 선배의 주문까지 더해진 날엔 특히 더 그랬으리라.
그래도 쌓이는 시간만큼 제목도 점점 나아졌다. 양이 질을 높이는 순간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자주, 오래, 많이 뛰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잘 뛰게 되는 이치다. 뛰다 보면 몸이 바뀐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쓴 하루키의 말처럼 뛰기 더 좋은 몸으로. 글도, 제목도 마찬가지.
10개씩, 5개씩 뽑아보라고 하던 제목이 어느 날엔 3개로 어느 날엔 2개로, 어느 날엔 하나만 더 뽑아봐라는 식으로 그 양이 줄어들었다. 가끔은 '좋다'는 말도 들었다. 또 어떤 날은 '기사에 비해 제목을 너무 잘 달았다'는 과한 칭찬도 들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내가 선배가 되어서야 K 선배가 왜 그렇게 많은 제목을 요구하는지 알았지만, 아래 인용한 글을 그때 미리 봤다면 조금 덜 서러웠을 것 같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는 자책이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자신이 만든 책을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에게 알리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가 집어 들게끔 하는 글을 써내는 감각이었다. 그럴듯한 글. 편집자는 그러한 글을 써낼 줄 알아야 했다."
오경철 편집자의 책 <편집후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고개가 절로 끄덕끄덕. 편집자가 써내야 할 줄 아는 '그럴듯한 글(보도자료)'이 나에게는 제목이었다. 제목을 뽑는 일은 그럴듯한 문장을 써내는 감각을 기르는 일이었다. 내가 보는 글을 더 많은 독자들에게 알리고, 더 많은 독자가 클릭하게끔.
선배들이 몇 개씩 제목을 뽑아보라고 한 것도, 내가 후배에게 다시 제목을 뽑아보라고 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조사 하나, 단어 하나, 서술어 하나, 순서에 따라 미묘하게 맛이 달라지는 제목이기에, 가장 어울리는 문장을 찾기 위해서다. 많은 경우의 수에서 꼭 알맞은 제목이 나오기도 하니까.
내가 쓴 글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오경철 편집자가 쓴 이 글에서 나는 다시 멈칫했다.
"나는 그에게서 편집자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배운 듯싶다. 그는 자주 말했다. 잘 읽어야 한다고. 원고를 잘 읽는 사람, 편집이라는 일을 하면서 나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잘 고치기보다 중요한 것은 잘 읽기였다."
'뭐야? 같은 사람이야?' 싶을 만큼 오경철 편집자가 말한 선배의 모습은 K 선배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가 그랬듯, 나 역시 내가 편집기자 일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 K 선배였다. 그도 언제나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뉴스가 뭔지, 기사의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며 읽어라, 사실관계가 맞는지 따져가면서 읽어라, 기사가 되는 내용인데 뭔가 내용이 빠져 있으면 채워 넣고 채워 넣을 수 없으면 직접 글 쓴 사람에게 물어봐라, 헷갈리는 내용은 이해한 대로 고치는 게 아니라 글쓴이에게 먼저 맞는지 묻고 확인한 다음 고쳐라, 기본적인 문장은 비문이 없도록 당연히 잘 고쳐야 하지만 글쓴이 고유의 문장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많이 고쳤을 때는 반드시 글쓴이에게 확인을 받아라...'
입사해서 처음 배운 이 편집 원칙들은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일하면서 늘 염두에 두는 말들이다. 편집하는 사람은 달라져도 편집하는 방법은 변하지 않았다. 나 역시 배운 대로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이야기고.
"그런데 어쩌지요? 10개를 뽑든 5개를 뽑든 제가 뽑는 제목은 다 고만고만해요"라는 하소연이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분들에게 우선 이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우선 박웅현의 책 <여덟 단어>에 나오는 내용을 먼저 보자.
할리우드에는 '7 words rule'이라는 게 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시나리오를 가져오니까 투자를 받고 싶으면 자기 시나리오를 단 일곱 단어로 설명해 보라는 건데, "전원 백수인 가족이 부잣집에 빌붙어 살려다 벌어지는 사건, <기생충>", "형사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인 여인에게 매혹됐다고? <헤어질 결심>" 이런 식으로 그림이 확 그려지도록 설명하라는 겁니다.
저자 박웅현은 어떤 글이든 예외는 없다면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일곱 단어로 정리되지 않는 건 아직 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제목의 가장 기본꼴이 있다면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문장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처럼, 내가 쓴 이야기를 (꼭 일곱 단어가 아니더라도) 한 문장으로 만드는 게 제목의 시작이다.
이런 스타일의 제목을 나는 주로 부제에서 사용한다. 제목으로 일단 독자의 눈길을 끌고, 부제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정리해서 설명해 주면 균형을 갖춘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부제 같은 제목이나, 제목 같은 부제를 발견하면 균형이 틀어진 것 같아 영 개운치가 않다.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신경 안 쓸 터인데...
그래도 제목 짓기가 어려울 때는 범위를 정해보자. 앞서 제목을 뽑다 뽑다 지치면 선배에게 범위를 정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어디를 중심으로 고민할지 범위를 정하면 좀 쉽다. 후배들과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제목을 상의할 때도 나는 더러 묻는다.
"이 글에서 특히 어느 부분이 인상 깊었어?"
그 부분을 중심으로 기사의 내용을 잘 담고 동시에 눈길을 끌 만한 문장으로 딱 맞는 제목을 지었을 때 묘한 쾌감이 든다. 그 느낌을 한글 타이포그라퍼 안상수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좋은 말을 찾아냈을 때가 참 기쁘더라고요. 딱 맞는 말이 있거든요. 언제나. 전 굉장히 그 순간이 짜릿하더라고요."
'좋은 말', '딱 맞는 말'을 '좋은 제목', '딱 맞는 제목'이라고 바꿔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말을 찾아내고, 문장을 짓는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씩 닮은 데가 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