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
2023년 11월 10일 오후 5시를 조금 넘어선 시간. 성인 둘, 중학생 하나, 초등학생 하나로 구성된 4인 가족이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위치한 모 한식주점 테이블에 앉았다.
동상이몽同床異夢
같은(同) 상(床)에 앉았으나 다른(異) 음식을 꿈꾼다(夢). 초등학생 둘째는 초지일관 자신의 최애 음식인 만재도 거북손이다. 매운 음식에 진심인 중학생 첫째는 김치메밀전병에 김치말이 국수다. 고기는 생선만 섭취하는 페스코 베지테리언 아내는 이미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방어회를 점찍은 상태다. 나는 간만에 소고기가 당기다 보니 집을 나설 때부터 새빨간 자태를 자랑하는 싱싱한 육회를 주문하기로 결심했다. 오늘 돈 좀 깨지겠구나.
콜키지프리 업장에 갈 때마다 와인을 꼭 챙겨간다. 어라? 소고기에는 레드 와인이고, 생선회에는 화이트 와인이 어울릴 텐데. 각 한 병씩 챙겨갔느냐고? 그냥 레드 와인 한 병이면 충분하다. 붉은빛이 감도는 미끌미끌하고 기름진 생선회, 이를테면 참치, 삼치, 고등어, 연어, 방어 등은 레드 와인과 궁합이 더 좋기 때문이다. 특히 풍미가 섬세하고 우아한 피노 누아 와인은 기름진 생선회에 곁들일 때 탁월한 선택이다.
이날 준비한 와인은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피노 누아로 만든 '도멘 앙또냉 귀용 쥐브리 샹베르땡 라 저스티스 2018'이다. 도멘 앙또냉 귀용은 생산자, 쥐브리 샹베르땡은 마을 이름, 라 저스티스는 포도밭 이름이다.
음식을 주문한 후 와인의 코르크를 제거하고 잔에 따른다. 루비가 녹아서 액체가 된다면 이런 색을 띨까? 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니 삼나무 가구에서 날 법한 맵싸한 향이 코 주변을 맴돈다.
이 향을 유독 좋아하는 나로서는 첫인상부터 합격이다. 한 모금 마셔 보니 산도가 높지 않고 진득하다. 유독 날씨가 더웠던 2018년에 수확한 포도로 양조해서 그런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콜릿 향도 감지되고 갈수록 풍미가 좋아진다. 기대 이상이다.
첫 음식으로 육회 등장이다. 깍둑썰기 네모난 육회 더미에는 간헐적으로 굵은소금과 통후추 알맹이가 뿌려져 있고 바로 옆에 얇게 썰린 배가 놓여 있다. 적당한 크기로 썰려 있다는 점 외에는 인위적 개입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음식.
신선하고 차가운 육회 한 점에 통후추 알맹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입에 넣어 질겅질겅 씹는다. 생고기 특유의 육향이 만발하는 가운데 통후추 알맹이가 으깨어져 화생방 가스 같은 알싸한 기운을 구석구석 퍼뜨린다.
문득 스페인 북부 알타미라 동굴에서 발견됐다는 동굴벽화의 벌건 소가 떠올랐다. 동굴에 터를 잡고 생활한 구석기인의 식생활이 이러했을까.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미식에는 군말이 필요하지 않다. 유전자에 면면이 새겨진 본능에 몸을 맡겨 저작운동에 집중하면 될 뿐. 한참 씹으니 소고기 특유의 감칠맛 뒤로 신맛이 은은하게 배어난다.
가지런히 썰린 배를 보며 속으로 한 마디 건넸다. '원래는 네가 등장할 차례인데 오늘은 귀한 분이 오셨으니 기다려주렴.' 붉은빛이 감도는 잔을 들고서는 구석기인은 그 존재를 몰랐을 게 분명한 문명의 소산물을 천천히 입속에 주입했다. 동굴 벽 이끼 같은 음습한 액체가 서늘한 육회의 질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과실 향을 품고 바닥에서부터 차오른다. 수만 년의 간극을 지닌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식문화가 한 사람의 구강 안에서 이런 식으로 조우할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육회의 풍미가 유전자 속 내밀한 무언가를 건드린다면, 와인의 그것은 문명을 개척한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과 수고를 떠오르게 만든다. 과거와 현대, 본능과 의식이 붉은 빛깔로 어지러이 교차하자 고개는 절로 끄덕여지고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맛있어!'를 연발하게 된다. 그렇게 한참 붉은 것들을 음미한 후 천덕꾸러기가 된 배가 가여워 한 조각 집어 들어 와삭와삭 씹는데 문득 위기감이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각자도생各自圖生
어느새 주문한 음식 일체가 상 위에 차려졌고 초등학생 둘째는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쾌속의 손놀림으로 거북손을 까서 먹는다. 중학생 첫째 앞에 놓인 김치메밀전병은 벌써 반쯤 자취를 감췄으며, 아내 앞의 방어회 접시는 음식이 놓인 영역보다 빈 바닥이 드러난 곳이 훨씬 넓다. 이대로 알타미라 동굴 속 정취에 넋을 잃고 있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 일단 젓가락을 붉은색이 감도는 방어회 쪽으로 선회했다.
그렇게 해서 입속으로 투하된 회 한 점은 조금 전에 육지 것이 나뒹굴었던 장소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를 일거에 변화시킨다. 기름이 바짝 오른 방어 특유의 미끄럽고 푹신한 질감 때문에 이것이 씹히고 있는지 녹고 있는지 분간하기 힘들 지경이다.
방어회 한 점이 휘젓고 지나간 구강 표피는 마치 프라이팬 표면처럼 얇게 기름이 둘리는데, 이때 피노 누아를 주입하면 와인의 타닌이 기름기와 만나 한결 부드러운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게 뭔가 부드러움의 돌림노래 같은 구석이 있어서, 앞서 다녀간 방어회의 소절을 피노 누아가 자신만의 음색으로 뒤따라 부른다고나 할까. 두 선율이 겹쳐 생성되는 화음도 훌륭하기 그지없다. 만약 부드러운 방어회 뒤로 예리하고 선명한 화이트 와인이 등장한다면 이만큼 조화를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혹시 몰라서 해산물과 잘 어울리기로 유명한 스페인 알바리뇨(화이트 와인)도 소량 챙겨 갔는데, 아내가 벌건 방어회에 하얀 알바리뇨와 빨간 피노 누아를 각각 마셔 보더니 빨간색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 잘라 말한다.
선입견 없이 감각기관을 통해 느낀 그대로를 얘기하는 아내의 말이기에 한층 무게감이 실린다.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가 뭐냐고? 아내는 와인 지식이 없다 보니 '원래 이래야 한다' 식의 편향된 사고가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혹자는 회에다가 레드 와인을 마시면 자칫 비린내가 심해지지 않느냐고 우려한다. 오크 숙성한 와인이 해산물의 비린내를 증폭시킨다고 얘기하는 이도 있다.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일본 연구자들이 쓴 논문을 통해 와인과 해산물이 만나 비린내가 증폭되는 현상의 진짜 원인을 알게 되었다(참고로,
미역줄기볶음에 와인을 마시다가 일어난 대참사 https://omn.kr/24vxu에서 자세히 다룬 적이 있다).
논문에 따르면 와인의 철분 함량이 높을수록 해산물의 비린내가 증폭된다고 한다. 레드, 화이트, 오크 숙성 여부와는 연관이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와인의 철분 함량을 아는 것이 유용할 테지만 논문 저자들은 철분 함량을 예측하는 게 어렵다고 얘기한다.
철분 함량은 와인의 종류나 생산국과는 관계없으며 포도가 재배되는 토양, 껍질에 묻은 먼지, 수확 및 수송, 파쇄 과정에서 사용되는 기계 등 양조 전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받기 때문이다.
옥에 티
공교롭게도 이날 방어회에서 아주 살짝 비린내가 났는데 오크 숙성을 하지 않은 화이트 와인 알바리뇨, 오크 숙성을 한 레드 와인 피노 누아 모두 비슷한 수준으로 비린내를 증폭시켰다(먹는 데 지장 없는 수준이었다).
만약 화이트, 레드, 오크 숙성 여부가 비린내 증폭의 결정적 요인이라면 두 와인이 확연하게 차이가 났을 것이다. 어쨌든 해산물에 와인을 곁들일 생각이라면 식재료가 싱싱해서 비린내가 나지 않아야 안심할 수 있다. 와인의 철분 함량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간은 흐르고 주문한 음식이 온 가족 뱃속으로 자취를 감출 무렵이었다. 뭔가 아쉬워서 밑반찬으로 나온 멸치볶음을 젓가락으로 한 움큼 집어 먹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음식값을 계산하기 전에 잔에 남아 있는 와인을 마저 마셨는데, 어이쿠야! 비린 맛이 제법 올라오는 게 아닌가. 붉은색 깔맞춤으로 근사하게 마무리됐을 저녁 미식에서 유일하게 오점이 남았구나.
멸치야! 네 죄(비린내)를 네가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