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
삼십 대 초반이었던 2006년에 첫 책을 출간하고서는 생각지도 못하게 제주여민회로부터 강의 요청을 받았다. 비행기를 탄 것도, 제주도를 가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뒤풀이 술자리에서 제주도 멸치를 대가리부터 고추장에 푹 찍어 잘근잘근 씹었다. 그 비릿하고 진득한 바다 내음, 연이어 들이켰던 한라산 소주의 서늘하고 쌉쌀한 청아함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이었기 때문이리라.
그 후 업무 혹은 여행으로 여러 번 제주도를 방문해 이곳저곳 둘러보았는데 유독 인상에 남은 관광지는 주상절리다. 자연에서 관찰되는 암석은 대체로 불규칙한 형태를 띠기 마련인데, 주상절리는 육각형 단면의 커다란 돌기둥이 벌집처럼 규칙적으로 붙어있어서 단번에 눈길을 끈다. 그 규칙적 형태와 배열은 마그마의 급속한 냉각 때문임이 현대과학으로 밝혀졌지만, 먼 과거의 조상들은 초자연적 존재의 의지와 힘이 작용했다고 오해할 법도 하다.
십여 년이 훌쩍 지나고 때는 2023년 11월 18일 토요일. 오후 3시를 조금 넘어선 시간에 나의 구강에서는 미각의 주상절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 귀하신 레드 킹크랩을 영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킹크랩과 주상절리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갓 쪄 나온 킹크랩 다리의 뾰족하고 딱딱한 껍질을 열어젖히면 함박눈을 꽁꽁 뭉쳐놓은 듯 새하얗고 두툼한 게살이 드러난다. 포크를 들고 살을 주욱 긁어본 사람은 안다. 뜨끈한 게살에는 주상절리처럼 결이 있고 층이 있다는 사실을.
입 안에서 느껴지는 주상절리
결대로 찢어져 포크에 매달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살덩이를 한입 베어 씹다 보면 짭조름하고 탄탄한 게살이 도미노가 쓰러지듯 입안에서 층층이 부서지는데, 그 묘한 질감은 제주도 주상절리의 규칙적인 구조를 떠올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제일 큰 집게발 속살이 특히 그러하다). 킹크랩을 최초로 쪄 먹은 호모 사피엔스는, 평범한 음식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이 비현실적인 맛에서 초자연적 존재의 의지와 힘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우야튼 겁나게 맛있구먼.
내 삶에서 킹크랩을 영접한 건 사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2015년 9월의 어느 날 우연히 마신 와인에 홀딱 빠져서 엥겔지수 100%에 도전하는 노빠구 미식의 삶으로 돌입하고 나서야 만나게 됐으니 말이다. 대가리에 고추장 바른 제주도 멸치나 한라산 소주도 나름 인상적이었지만 킹크랩을 맛본 순간과 비교할 수는 없다. 충격으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돌이켜보면 당시는 그 놀라움을 표현할 언어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처음이었으니까. 어쩌면 프로 작가이다 보니 입금이 예상되지 않아 적절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푹 찐 갑각류를 섭취할 때면 이것 외에 다른 주종을 떠올린 적은 없다. 샴페인 말이다. 마침 집에 보관 중인 델라모트 브뤼, 드보 퀴베 디 브뤼 중에서 심사숙고 끝에 델라모트 브뤼를 선택했다. 판단의 근거는 샤르도네 비율이다. 샴페인을 만들 때는 샤르도네,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르 이렇게 세 품종이 주로 사용되는데, 양조 정보를 찾아보니 델라모트 브뤼는 샤르도네 60%, 피노 누아 35%, 피노 뮈네이르 5%를 섞었고, 드보 퀴베 디 브뤼는 피노 누아 55%, 샤르도네 45%를 섞었다. 델라모트 브뤼가 샤르도네 비율이 15% 정도 높아서 더 상큼하고 해산물과 잘 어울릴 것으로 판단했다.
잔에 따라 향을 맡고 한 모금 입 안을 적셔보니 샴페인 특유의 이스트 향기도 적당히 있고 샤르도네 비율이 높은 샴페인에서 기대할 수 있는 상큼함도 보여준다. 놀라운 것까지는 아니지만 모자람 없이 기본기에 충실하니 음식에 곁들일 용도로는 안성맞춤이다. 뽀글뽀글 올라오는 샴페인의 기포가 해변가 주상절리에 주기적으로 부딪히는 파도의 하얀 기포처럼 느껴지는 건, 층층이 부서지는 킹크랩을 먹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4인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았건만 쥐 죽은 듯 조용하다. 특별한 진미를 먹을 때나 일어나는 기현상이다. 오물오물 우물우물 우걱우걱 냠냠. 누군가 살이 허옇게 붙어있는 다리짝을 앞에 놔두고서 굳이 하나 더 확보하겠다고 손을 뻗는다. 하지만 손보다 빠른 눈은 그 행위를 실시간으로 포착한다. '건들지마! 손모가지 날아가붕게'라는 영화 대사가 떠오를 만큼 강력한 제지가 이어진다. 이래저래 눈치를 봐야 하는 바깥 사회생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즉각적이고 단호한 반응이다. 가족이란, 이런 것이다.
"마트에서 파는 게맛살하고는 차원이 달라. 도대체 그런 가공식품에 어떻게 감히 게맛살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지?"
돌연 등장한 아내의 목소리는 대놓고 킹크랩 예찬이지만 솔직히 말해 너무 비싸서 가성비가 떨어지는 건 부인할 수 없다. 킹크랩 주문할 돈으로 마트 게맛살을 산다면 카트에 수북이 쌓일 테니까. 하지만 우리 가족 전 구성원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성비가 아니라 하이엔드를 추구하고 있다. 부자들이야 자주 먹는 음식이겠지만, 1년에 한 번 눈 질끈 감고 먹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가성비 운운하면 좀 야박하지 않은가. 게다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문화의 발전은 대체로 가성비가 아닌 하이엔드에서 촉발되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 가족은 인류 식문화 발전의 최일선에서 분투 중이다.
킹크랩 몸통은 다시 라면 속으로
한참을 게걸스럽던 두 딸은 느끼해서 더 이상 못 먹겠다며 수저를 놓았다. 참으로 효녀구나. 마침 함께 딸려 온 게장비빔밥이 있으니 얼마든지 먹으렴. 아빠는 샴페인 덕분에 느끼함을 모르고 게살을 무한 흡입할 수 있단다. 너희가 샴페인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아빠가 좀 더 많이 먹어야겠구나. 그나저나 토요일 낮의 킹크랩은 한 주를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보상 같은 느낌이다. 뭔가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년간 아내와 선물을 주고받아 본 기억이 없구나. 가족이란, 이런 것이다.
그렇게 게 눈 감추듯 먹어대다가 뒤늦게서야 아무것도 메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인과 음식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데 말이야. 킹크랩과 샴페인 조합은 나에게 '쓰는 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도록 만들었다. 대상을 살펴보고 냉철하게 평가하려면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해야 하는데, 킹크랩과 샴페인을 번갈아 주입하다 보니 그 풍미에 휩쓸리고 견인되어 '먹는 자'로서의 정체성만 남아버렸다.
어느덧 다리 살은 끝장났고 몸통 살만 남았다. 제법 포만감이 느껴지니 이제야 부정(父情)이 뻘쭘하게 고개를 든다. 라면홀릭인 중학생 첫째 딸을 위해 라면에 킹크랩을 투하해 팔팔 끓여서 대령했다. 아버지가 끓인 라면이라 특별한 맛이 난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그것은 유물론자로서 할 수 없는 이야기다. 킹크랩 몸통에서 우러나온 감칠맛 가득한 게살 풍미가 공산품 스프 국물에 녹아드니 한 그릇에 3만 원이더라도 주문할 놀라운 맛으로 재탄생한다. 마트 게맛살에 부정(父情)을 한껏 담아 라면에 욱여넣는다고 이 맛이 재현되겠는가. 킹크랩 몸통 살은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승리를 명백하게 증명한다.
캬! 이거지! 음주 모드에서 해장 모드로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가교역할이야말로 킹크랩 라면의 장점이다. 평소에 라면을 먹지 않는 나조차도 이것만은 거부할 수 없다. 후루룩후루룩 면치기를 하다가 문득 맞은편에서 같은 방식으로 먹고 있는 첫째 딸을 보았다. 타인이 먹는 장면에서 이토록 흐뭇하고 대견하고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가족이란, 이런 것이구나. 아빠가 오늘은 너무 많이 먹어서 미안하다. 다음에는 다리 살도 라면에 넣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