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향유하려면 자신이 보유한 화폐 한도 내에서 구매력을 행사해야 한다. 내내 또래 직장인보다 수입이 적은 삶을 살아온 작가이다 보니 한정된 재원으로 미각 만족도를 극대화하는 난제를 푸는 일에 꽤 익숙해졌다.
물론 처음부터 술술 풀었을 리는 만무하다. 돌이켜 보면 와인 애호가로서의 궤적은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엎어지고 자빠지고 다치는 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몇 가지 깨달음을 얻었고 그것이 작금의 와인 구매에 중요한 지침으로 작용하고 있다. 부족하나마 그 지침을 소개하고자 한다.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찾자
마트든 백화점이든 전문 매장이든 와인 파는 곳에 들어서면 진열된 와인의 다양성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하얀 거, 빨간 거, 분홍빛 나는 거, 거품 올라오는 거, 단 거, 달지 않은 거, 신 거, 부드러운 거, 묵직한 거, 가벼운 거, 미국 거, 프랑스 거, 칠레 거, 싼 거, 비싼 거 등등.
도대체 뭘 골라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으면 수입사 직원이 다가와 '찾는 와인 있으세요?'라고 말을 건넨다. 그렇다고 '맛있는 거 찾고 있어요'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물쭈물하다 보면 어느새 수입사 직원이 작심하고 건넨 와인이 손에 들리게 된다.
이런 난감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폭을 좁힐 수 있는 제한조건이 필요하다. 나에게 있어 그 조건을 제공하는 핵심 요소는 '음식'이다. 오늘 저녁에 먹을 음식이 삼겹살이라면 샤르도네 혹은 산지오베제을 선택할 것이고, 해산물이라면 샤블리 또는 알바리뇨를 구입할 것이다.
음식마다 어울리는 와인이 따로 있으니 자연스럽게 선택지가 줄어들고, 반주 용도라 굳이 비싸고 좋은 와인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음식과 와인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맛의 시너지 효과는 덤이다.
문제는 음식과 와인 페어링에 관한 지식이다. 와인 책을 보면 다양한 음식과 와인 조합이 나오지만 추천 음식이 대체로 서양식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와인 지식이 대체로 서양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애호가의 필수 앱인 와인서쳐도 마찬가지다. 와인서쳐에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검색하면 'Beef and Venison'을 곁들이라고 추천하는데, Beef는 소고기지만 Venison은 초중고에 대학까지 영어 공부를 하면서도 처음 접하는 단어였다.
찾아보니 사슴고기란다. 앱 제작자가 영국인이다 보니 그 나라의 식생활이 반영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 음식에 와인을 즐기고 싶은 이에게는 한계가 있다.
일단 매장의 수입사 직원에게 물어보는 방법이 있겠다. 오늘 삼겹살 구워 먹을 건데 2만 원대 와인으로 좋은 거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런데 수입사 직원도 지식과 내공이 천차만별이다. 이제 갓 입사해 교육받고 업무에 배치됐다면 매뉴얼 대로 고객 응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다.
솔직히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은 제법 경험이 있는 애호가들도 까다로워하는 분야다. 그러니 일단 경력과 내공이 느껴지는 직원에게 문의하는 게 그나마 원하는 답변을 얻을 확률이 높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페어링 정보를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개인적으로 한식에 추천하는 와인은 드라이 리슬링이다. 맵고 간이 센 음식과의 궁합이 상당히 훌륭하기 때문이다.
가격에 유의해 호구가 되지 말자
이십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한 국내 최대 온라인 와인 커뮤니티 '와쌉'은 '와인 싸게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왜 그 수많은 사람이 하필이면 와인 싸게 사자는 기치 아래 모이게 되었을까? 같은 와인인데도 이쪽 매장에서는 3만 원, 저쪽 매장에서는 7만 원인 게 대한민국 와인 시장의 어질어질한 현실이다. 하여 애호가들은 가격에 매우 매우 매우 민감해졌다.
일단 와인 가격 정보에 어둡다면 백화점에서 구입하는 건 피하시라. 최근에는 좀 나아진 것 같지만, 백화점에 진열된 와인의 가격표를 보면 '한 놈만 걸려라' 수준으로 상식을 벗어난 수치가 적혀 있어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물론 가격 협상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라고 묻는 그 옛적 용산전자상가가 떠올라 그다지 반갑지는 않다. 물론 백화점만의 장점도 있다. 구하기 힘든 고급 와인을 상당히 좋은 가격으로 구매할 기회가 가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로 그런 기회는 백화점 매장에서 큰 돈을 쓴 VIP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내 경우 마트에서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할인 장터를 활용한다. 대체로 좋은 가격에 와인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터 시기가 아니더라도 할인 가격 그대로 판매하는 와인이 제법 있으니, 평상시 방문하더라도 수입사 직원에게 할인 가격으로 판매하는 와인 위주로 추천해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새마을구판장, 빅보틀, 조양마트 같은 와인 애호가들의 성지도 좋은 선택지다. 규모가 작은 매장이라 마트에 비해 와인 종류는 적지만 애호가들이 선호하는 와인 위주로 구비되어 있고 가격도 상처받은 애호가들의 마음을 달래줄 정도로 훌륭하다. 서울시의 경우, 온누리상품권을 구입해 제로페이로 결제하면 10% 할인 효과까지 누릴 수 있어서 금상첨화다.
가장 추천하고 싶은 구입처는 와인 직구 대행 사이트다. 최근 위클리와인, 비타트라 독일 같은 사이트가 애호가들의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해외 도매상으로부터 와인을 직접 소싱해 한국 소비자의 집까지 택배로 배송해 준다.
방구석 클릭으로 모든 게 해결되니 편리하기 그지없으며 가격마저 놀랍도록 착하다. 와인 직구 대행 사이트의 상품 가격은 해외 배송비와 세금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국내 판매가보다 저렴한 경우가 많아 금세 매진되기 일쑤다.
참고로 전 세계 와인 판매가를 확인할 수 있는 와인서쳐는 애호가의 필수 앱이다. 와인 구매 시 앱을 열어 해외 판매가와 비교하는 습관을 들이면 충동구매를 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내 입맛에 맞는 와인을 찾자
대체로 비싼 와인이 맛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와인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포도 품종이 워낙 다양해 그중 나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저렴한 녀석이 있기 마련이다. 같은 2만 원대 와인이더라도 특정 품종 와인의 맛과 향이 유독 나를 사로잡기도 하는데, 나에게는 리슬링이 그런 품종이다.
리슬링은 애호가들이 상당히 선호하는 품종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몇 년 전 리슬링에 큰 인상을 받아 저렴한 것부터 제법 가격이 있는 것까지 다양하게 마셔보았다. 모든 가격대에서 하나같이 인상적이다 보니 어느덧 리슬링 전도사가 되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다.
물론 사람마다 입맛이 다를 수 있으니 내가 리슬링이 만족스러웠다고 다른 사람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어쨌든 자신의 취향을 알게 되면 와인 구입에 사용하는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만족도는 유지할 수 있다. 부담 없는 가격대로 다양한 품종을 경험해 보고 그중 좀 더 와닿는 녀석이 있다면 콕 집어서 다양한 가격대로 경험해 보는 게 슬기로운 와인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나름 맨땅에 헤딩하며 깨달은 와인 구매 노하우를 적어 보았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항상 의도한 대로 맘먹은 대로 굴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나 역시 지금도 종종 충동적으로 와인을 구매하며, 그런 돌발성과 즉흥성을 통해 예기치 않은 기쁨을 얻기도 한다.
다만 우리의 은행 잔고는 그다지 여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경제적 동반자의 울분이 등짝 스매싱으로 표출되는 상황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