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
'그랑 에네미고 토론테스.'
이 와인을 처음 만난 건 모 수입사가 작년 10월에 주최한 아르헨티나 '엘 에네미고' 와이너리 시음회에서였다. 와인 애호가라면 아무래도 엘 에네미고의 대표 와인인 '그랑 에네미고 괄타라리'를 기대하게 된다. 카베르네 프랑 85%에 말벡 15%의 비율로 블렌딩 한 와인인데 2013 빈티지가 남미 최초로 로버트 파커 100점을 받았고 그 뒤로도 꾸준히 고득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저렴이 품종으로 최고급 화이트 와인
이날 등판한 일곱 병의 엘 에네미고 와인 중에는 로버트 파커 100점의 주인공인 괄타라리 2013, 2019가 있어서 애호가들의 기대감을 한껏 부풀게 했다. 아내와 함께 맨 앞에 앉아서 일곱 와인을 차례로 마시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100점 받은 괄타라리가 끝내주는 것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일 테지만, 나와 아내는 정작 다른 와인에 더욱 큰 인상을 받고 제대로 꽂혔으니 바로 '그랑 에네미고 토론테스'다. 빈속에 와인을 마시다 보니 심지어 로버트 파커 100점 와인도 남겼지만, 이 와인만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실 정도였다.
토론테스는 대체로 1~2만 원대의 저렴한 화이트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청포도다. 아르헨티나가 주 생산지인데 은은한 꽃향기, 부담스럽지 않은 산도, 가벼운 바디감으로 술술 넘어가는 가성비 품종이다. 그런데 와인서쳐 앱으로 확인한 그랑 에네미고 토론테스의 해외 평균가는 무려 10만 원(세금 제외)이다. 이건 뭐 한 병에 5만 원하는 참이슬 소주를 만난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엘 에네미고' 와이너리 관계자들은 발상의 전환에 능한 것 같다. 카베르네 프랑은 대체로 레드와인에 소량 첨가되어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품종이다. 이것을 메인으로 해서 로버트 파커 100점을 받은 것도 놀라운데, 대표적인 저렴이 품종 토론테스로 자사의 최고급 화이트와인을 만들다니.
시음회 이후에도 고급 토론테스의 풍미가 뇌리에 남아 결국 수입사에 전화해 판매처를 문의했다. 수입 물량이 수백 병 수준이라 현대백화점에만 들어간단다. 가격은 15만 원이라고 했다. 해외 평균가가 세금 빼고 10만 원이니 백화점 치고는 나름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생각이 들어 현대백화점 목동점에서 한 병 구매했다.
리슬링처럼 길쭉한 병 모양이 인상적인데, 엘 에네미고의 양조책임자 알레한드로 비질이 독일 모젤 지역의 리슬링을 워낙 좋아해서 그렇단다. 실제로 독일 리슬링의 풍미와 뉘앙스를 지향해 그랑 에네미고 토론테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곁들일 음식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다가 문득 멕시코 음식이 떠올랐다. 이 갑작스러운 뉴런의 연결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모두 중남미 대륙에 있고 같은 언어(스페인어)를 사용해서이려나. 중남미 음식 중에서는 그나마 멕시코 음식이 친숙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떠오른 음식과 시음회의 그 와인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해 보니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건 뇌내망상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제법 가격대가 있는 와인인데 음식과의 미스매치로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확신을 얻고 싶어 마이크로소프트 인공지능 검색 빙에게 물어보았더니 와인 폴리에 올라온 관련 글 주소까지 알려주면서 아주 잘 어울린다고 등을 떠민다. 멕시코 음식의 매콤하고 강렬한 맛과 토론테스의 상큼한 산미 및 과일 향이 상호 보완적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래! 이정도면 괜찮겠지. 인근에 제법 평이 좋은 멕시코 음식점이 있어서 돼지고기가 들어간 타코(나), 브리또 보울(아내)를 선택해 배달 주문을 넣었다. 곧 음식이 도착했다. 포장을 뜯어 식탁에 늘어놓은 후, 시원하게 마시려고 일부러 냉장고에 넣어둔 와인을 꺼내어 잔에 따랐다.
아내는 올해가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인데 라벨에도 용 비스무리한 게 있다며 시각적 의미부터 부여한다. 외견은 아랑곳하지 않고 맛과 향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나는, 시음회의 그 느낌을 기대하며 후각 및 미각 센서의 민감도를 한껏 끌어올려 탐닉 모드로 전환했다.
역시 코에서부터 심상치 않다.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연기 향 너머로 수줍고 단아한 꽃향기가 봄바람처럼 하늘하늘 섬세하면서도 세련된 자태를 드러낸다. 마치 잘 다듬어진 일본식 정원의 곱디고운 흙 속에서 피어난 한 떨기 백합 같다고나 할까.
한 모금 머금어 보니 코에서의 느낌이 입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데, 마시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상큼하면서도 절제된 신맛, 깔끔하게 정돈된 흙 향,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깔린 과실 향 등 모든 요소가 혼연일체가 되어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이 신선함과 상큼함과 청아함은 독일의 고급 드라이 리슬링을 떠오르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리슬링에 대한 양조자의 팬심이 토론테스라는 품종에서 성공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을 양조자의 노력이 떠오르니 살짝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이런 와인은 뭔가 꿀떡꿀떡 들이키면 실례인 것 같아 천천히 조심스럽게 음미했다.
메뉴 선택에 그토록 신중했건만
이제 음식을 섭취할 차례. 배달 용기 안에는 타코 세 개가 잘 빚은 만두처럼 놓여 있고 구석에 조각 레몬이 놓여 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레몬즙을 타코에 뿌려 먹겠지만, 지금은 와인과 즐기고 있으니 가만두었다.
신맛이 나는 음식이 대체로 와인과 잘 어울리지만서도, 그 신맛이 와인을 압도할 정도로 과도하면 음식과 와인은 어울리지 않고 충돌한다. 그러니 섣불리 레몬즙을 투하했다가는 음식과 와인의 궁합을 해칠 수 있다.
예측한 대로 멕시코 음식과 토론테스의 궁합은 꽤 준수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음식에 비해서 와인이 너무 고급이라 5성급 호텔 식당에 앉아 떡볶이와 김말이를 먹는 것 같은 위화감이 구강 내부에서 느껴졌다. 그랑 에네미고 토론테스 정도의 와인은 좀 더 근사한 음식과 매칭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맞은 편에서 예상치 못한 아내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음식과 와인이 너무 안 어울리는데?"
"그래? 난 잘 어울리는데, 왜 그렇지?"
"너무 신맛만 강하게 올라와. 그래서 속이 산성화 되는 느낌이야."
혹시나 해서 아내가 주문한 브리또 보울을 한 숟가락 퍼서 먹었는데, 어이쿠야! 소스가 엄청나게 신 것 아닌가. 이러니 문제가 될 수밖에.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다른 음식과 먹으라고 권했다. 마침 아이들 주려고 주문한 김밥이 있어서 아내가 그걸 집어 먹는데, 공교롭게도 신맛이 강한 묵은지가 들어간 김밥이었다.
"와인을 마시는 게 아니라 신맛 나는 자몽 액을 마시는 것 같네."
"시음회 때 우리 둘 다 너무 맛있게 마셨는데…."
"그때는 그랬는데, 오늘은 날이 아니네."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하듯 내 잔 속 와인은 여전히 끝내준다. 솔직히 아내가 마시는 와인이라고 화학적 구성이 다르겠는가. 하필이면 아내가 먹는 음식이 와인보다 훨씬 더 신맛이 난 게 안타까울 뿐이다.
멋진 와인과 멋진 음식이라 하더라도 둘 사이의 상성이 좋지 않으면 함께 먹었을 때 각각의 장점마저 퇴색된다. 하필이면 그 생생한 사례가 눈앞에서 펼쳐질 줄이야. 석 달 전 아내 본인이 그렇게 극찬했던 와인이 이 순간만큼은 짝지를 잘못 만나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그러건 말건 이쪽 와인은 여전히 훌륭한 페이스다. 시원함이 가실 정도로 온도가 상승했지만 그로 인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는 달큼한 향까지 매력적이다. 점점 줄어드는 와인도 아쉽고 이 감동을 공유하지 못한 아내의 상황도 못내 아쉽다.
여보! 미안해. 다음에는 음식을 선택할 때 좀 더 세심하게 따져 볼게. 그래도 매주 와인과 음식을 벌여놓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부부의 궁합만큼은 최고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