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
개성주악. 이 끝내주는 한과를 처음 접한 곳은 지난 2월 6일 제주도 신화테마파크에서였다. 한참 이것저것 놀이기구를 즐기다가 섬 특유의 매서운 칼바람에 체력이 바닥나 인근 카페로 대피했다. 아내와 두 딸이 출출하다길래 음식과 음료를 주문하려고 메뉴를 살펴보는데 자그마한 도너츠인지 찹쌀떡인지 동그랗고 오동통한 '개성주악'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한과가 인기라더니 카페에서도 이렇게 파는구나. 호기심이 동해 주문해서 먹어보았다. 첫 만남이라 치아의 저작운동 속도를 평소의 절반으로 낮춰 조심스럽게 씹기 시작했다.
겉표면 식감은 바삭한데 표피를 뚫고 내부로 들어가니 옹골차고 탱글탱글하고 졸깃한 찹쌀이 감지된다. 흥미로운 건 씹을 때마다 단맛 나는 촉촉한 수분이 스며 나온다는 점이다. 그냥 찹쌀떡을 먹다 보면 수분이 없어 답답하고 목이 막히지 않나. 그런데 주악은 씹을수록 단물이 우러나와 입안이 촉촉하고 상쾌하며, 그 단맛 또한 은은하고 깊다.
유과, 약과, 강정 정도만 알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옆에서 함께 먹던 아내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날 이후로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내내 맴돌았다. 날을 잡아서 근사한 스위트 와인에다가 이 고급진 한과를 곁들여 먹어야겠구나!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귀하게 부패한 '샤토 쿠테 2005 와인'
마침 지인이 우리 부부를 집으로 초대했는데 당일에 샤토 쿠테 2005 와인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샤토 쿠테는 프랑스 보르도의 소테른-바르삭 지역에서 생산된 스위트 와인이다. 이 지역에서 생산된 스위트 와인은 귀부(貴腐) 와인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귀貴하게 부腐패한(영어로는 Noble Rot) 와인이라는 의미다.
밤새 안개가 끼고 습하면 포도에 '보트리티스 시네레아'라는 곰팡이가 자란다. 이 곰팡이는 포도 껍질에 미세한 구멍을 내는데, 낮에 태양이 내리쪼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면 구멍을 통해 수분이 증발해 당과 산 성분이 농축된다. 이 곰팡이 핀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매우 높은 당도를 갖는다. 곰팡이가 잘 번지려면 껍질이 얇고 포도송이가 가깝게 밀집되어야 유리한데, 그런 조건에 적합한 세미용, 소비뇽 블랑 품종이 주로 사용된다.
앞서 얘기했듯 곰팡이가 잘 번식하려면 밤새 안개가 끼고 습도가 높아야 한다. 하지만 계속 습기만 차 있으면 포도가 썩기 때문에 낮에는 태양도 내리쬐고 바람도 불어 수분이 증발하고 곰팡이 성장도 적당하게 억제해야 한다. 프랑스의 소테른 지역에서 귀부 와인이 생산되는 이유는 이 까다로운 기후 조건을 만족하기 때문이다.
모든 포도알에 일괄적으로 곰팡이가 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쭈글쭈글하게 잘 마른 포도알만 골라내는 작업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그렇게 일일이 고르고 고른 포도알만 사용하니 단위 면적당 소출량도 적다. 까다로운 기후 조건에 품은 많이 드는 데다가 생산량까지 적으니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불한 가격을 배신하지 않은 황홀한 맛과 향을 선사한다.
샤토 쿠테는 소테른-바르삭 지역에서도 품질이 좋기로 손꼽히는 생산자인 데다가 우리가 마시는 녀석은 2005 빈티지이니 19년 숙성된 와인의 매력까지 기대할 수 있지 않나. 이런 근사한 와인을 우리 부부를 위해 내놓겠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방문할 때 양손을 좀 무겁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속 당일 지인 집에서 가까운 하남 스타필드의 전통떡방에 들러 딱 봐도 고급스러운 주악, 약과 세트를 구입했다. 동서양 디저트 대결도 재미있겠다 싶어 케이크산도도 샀다. 작년에 지인 부부가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함께 와인 일곱 병을 비우고 이튿날 숙취로 고생한 일이 떠올랐다. 오늘만은 과음하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지인 부부와 여섯 살 아들, 그리고 잘생긴 시바견이 우리 부부를 맞이한다. 특히 시바견은 앞발을 내 바치춤에 올리고서는 격렬하게 꼬리를 흔들며 마치 옛 주인이라도 만난 듯 성화다. 자신과 주인 이외의 존재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반겨주다니. 고놈 참, 사람 볼 줄 아는구나. 하하.
우리 부부가 가져간 '폰타나비앙카 바르바레스코 2020'부터 마시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바르바레스코 마을의 네비올로 포도로 만든 레드 와인이다. 통삼겹살 오븐구이와 곁들였는데 와인과 음식의 궁합이 매우 훌륭하다.
이탈리아 레드 와인은 신맛이 잘 살아 있어서 느끼한 돼지고기와 잘 어울린다. 바르바레스코 마을의 네비올로는 그 유명세답게 대체로 비싸지만 '폰타나비앙카 바르바레스코'는 상대적으로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준수한 데다가 숙성하지 않고 바로 마셔도 부드럽게 넘어간다.
다음 와인은 지인 측에서 내놓은 프랑스 부르고뉴 화이트 와인 '도멘 기 아미오 에 피스 뫼르소 수 라 벨르 2020'이다. 부르고뉴 와인 이름은 복잡한 암호문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알파벳으로 쓰면 'Domaine Guy Amiot et fils Meursault sous la velle 2020'인데, 도멘 기 아미오 에 피스(Domaine Guy Amiot et fils)는 생산자, 뫼르소(Meursault)는 마을 이름, 수 라 벨르(sous la velle)는 밭 이름이다. 샤르도네 품종으로 만든 와인인데 기대대로 삼겹살과 아주 잘 어울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풍부하고 다채로운 향이 피어오르니 갈수록 맛있어진다.
그러고 보니 지인 부부와 함께 나눈 와인이 (지난 모임을 포함해) 벌써 아홉 병째구나. 한 병, 두 병, 세 병, 네 병…. 이렇게 아홉 병째에 도달하니 어느덧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심리적 거리감이 좁혀졌다.
한 마디로 맨정신에 못 할 얘기들이 튀어나온다는 의미다. 박장대소하다가, 안타까워하다가, 마치 테마파크에 온 듯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이렇게 대화의 흐름에 휩쓸려 너무 많은 술병을 비우다 보면 속 깊은 내용물(소화액 포함)을 쏟아내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니 기분 좋게 취하되 도를 지나치지 않으려 긴장감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신맛과 단맛이 이루는 절묘한 균형감
드디어 열 병째! 샤토 쿠테 2005가 등판했다. 동양 대표로 나선 개성주악, 약과. 서양 대표로 나선 케이크산도. 이들을 앞에 놓고서는 일단 와인의 향부터 음미했다. 달콤한 꿀 향, 과일잼 향, 위스키에서 감지될 법한 진한 나무통 향 등이 어우러져 다른 냄새가 끼어들 여지없이 주변 공기를 완벽하게 장악한다. 입안에서는 제법 무게감이 느껴지는 가운데 신맛과 단맛이 이루는 절묘한 균형감이 와인의 우수성을 여실히 증명한다.
이 황홀한 여운이 가시기 전에 주악 하나를 집어서 베어 물었다. 과하지 않은 단맛과 한과 특유의 독특한 질감이 와인의 여운과 매끄럽게 연결되는데, 세련되고 우아한 1악장 뒤에 이어지는 유쾌한 미뉴에트 풍의 2악장을 떠올리게 한다. 이 절묘한 어울림을 한참 음미하는데, 맞은편에서 지인의 부인이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약과도 너무너무 맛있어요."
주악의 바삭졸깃한 식감에만 몰두하고 있던 나에게 새로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성이었다. 약과가 다 거기서 거기일 텐데 하는 의구심으로 하나 집어 들어 치아를 욱여넣는데, 오잉? 보통의 약과에서 예상되는 꾸덕꾸덕함이 아닌 아삭아삭한 질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사과도 아니고 이런 식감이라니! 씹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다.
그렇게 네 명 모두 한과와 와인의 기막힌 궁합에 몰두하다 보니 서양 대표인 케이크산도는 한참을 천덕꾸러기처럼 남아있었다. 지하철 막차 시간이 다가올 즈음 그 모습이 안쓰러워 하나 집어먹었다. 잘 만든 케이크에서 예상할 수 있는 바로 그 맛이다. 다만 오늘은 대진운이 너무나 안 좋을 뿐.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아내는 술에 취해 나에게 기대어 잔다. 그래도 내 어깨가 아직은 꿀맛인가 보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열 번째 와인의 달달한 여운이 은근하게 떠오른다. 그 여운의 실타래를 따라가다가 문득 지인이 술김에 털어놓은 기막힌 사연이 쇼츠 영상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속 깊은 얘기를 나눈다는 건 삶의 달달하지 않는 부분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단맛만 가득한 삶이 그 어디에 있겠는가만은 평온한 인생의 여정에서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쓴맛 일색의 불청객을 반길 수 없는 건 인지상정이다. 코스 요리가 앙증맞은 단맛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이유는 디저트의 여운처럼 행복한 삶이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건 아닐까.
올 한해 우리 부부와 지인 부부의 삶이 귀부 와인과 한과의 조합 같은 달달함으로 가득하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