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코로나19가 전국을 휩쓴 때였다. 마스크가 모두의 얼굴을 반 이상 가리던 시기, 경기도 파주시 운정화성파크드림시그니처 아파트의 입주가 시작됐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에게 간단한 안부를 묻기도 조심스러웠던 분위기는 새로 이주한 도시와 집을 더 낯설게 했다. 이 적막을 깬 것은 2021년 10월 31일, 아파트 온라인 카페에 올라온 글 하나였다.
'핼러윈 기념해서 아이랑 사탕 나누려고 해요. 동참할 분은 저녁 6시 놀이터로 와주세요.'
그날 100여 명의 주민이 놀이터를 찾았고, 글을 올린 임민아씨는 그 풍경에 이웃을 만나고 싶었던 마음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마을 미디어를 육성하는 '미디어랩 이유'의 대표이자 드림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아파트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는 임민아씨에게 그 이야기를 들어봤다.
'드림커뮤니티'의 시작
"저희는 무인 택배보관소에서 만나요. 보관소 공간 양옆엔 택배보관함이 있고 중앙에 큰 테이블이 하나 있죠. 아파트에서 만나는 거니까 저녁 먹고 슬리퍼 신고 나가도 돼서 편해요(웃음)."
이웃들 사이에 숨어있던, 서로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를 발견한 임민아씨는 그 후 파주시 시립도서관의 독서공동체 지원 공고를 발견하곤 아파트 온라인 카페에 공유했다. 임민아씨의 글에 반응한 이는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공동체활성화이사를 맡고 있던 최현준씨. 그의 주도하에 10명의 주민이 무인 택배보관소에 모였다.
"하필이면 그렇게 모인 10명 중에 책을 열심히 읽거나 독서 모임을 해본 사람이 없는 거예요(웃음). 같이 1권을 골라 읽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시집, 동화책 등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만나기로 했어요. 2주에 한 번씩 모임이 있었는데, 다들 처음이다 보니까 꼭 완독하지 않아도 출석에 의의를 두기로 했죠. 그랬더니 언제부턴가 책 읽는 사람이 10명 중에 2명 뿐이더라고요(웃음)."
독서 모임이 애초의 취지를 제대로 충족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모임' 자체는 1년 넘게 꾸준히 이어질 수 있었다. 새로운 지역으로의 이주, 게다가 코로나로 타인과의 접촉마저 제한돼 있던 상황이 사람과의 만남을 더 그리워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순항하던 독서 모임도 코로나 확산으로 대면 모임이 제한되면서 결국 중단됐다.
그때 운명처럼 발견한 또 다른 모임거리는 '경기도 공동주택 공동체지원 사업'이었다. 독서 모임을 꾸준히 해온 주민들에게도 '공동체 활동'은 여전히 낯선 개념이었지만 무인 택배보관소에서 다시 머리를 맞댔다. 그렇게 "잘 모르는 채 제출한 계획서가 덜컥 선정"되며 운정화성파크드림시그니처 아파트에 신생 주민 조직 '드림커뮤니티'가 탄생했다.
이웃 간 첫 만남을 주선합니다
아파트 공동체 지원사업에 선정돼 마을공동체 활동을 꾸리게 됐으니 '마을공동체'를 제대로 배워보고자 똑똑도서관 김승수 관장 등 공동체 활동 전문가를 모셔 마을 학교를 열었다. 더불어 재능을 활용해 마을 강사로 활동할 주민을 모집했는데, 이를 통해 새로운 인연을 연결하는 수확을 얻었다.
"뜨개 모임 주민들은 초반엔 무인 택배보관소에서 모이시더니 이제는 서로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면서 모임을 이어가고 계세요. 그림 그리는 모임에서 만난 주민들도 따로 만나면서 친구를 사귀어 가는 것 같아요."
임민아씨는 "솔직하게 말해서 동아리 또는 취미 모임이라고 부를만한 모임도, 체계적인 운영 방식도 물론 없다"는 말을 꺼냈다.
"저희가 하는 일은 이웃 간 첫 만남을 주선하는 거예요. 다른 주민과 나누고 싶은 게 있는 이들을 강사로 초빙하고, 또 주민들이 마음이 맞아 계속 모이길 원하시면 모임 장소로 무인 택배보관실을 이용할 수 있게끔 도와드리는 것까지가 드림커뮤니티의 역할이죠. 지금 아파트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모임은 주민들의 자발적 모임이에요."
자발성을 바탕으로 자연스레 관계가 이어지고 깊어지는 것. 어떤 면에선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는 방식보다 더 나아간 공동체의 모습이 아닐까. 골목, 둥구나무 등 전통적인 마을 공유 공간은 없지만 무인 택배보관소와 공동체 활동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그 역할을 채우고 있는 드림커뮤니티.
물론 마을 학교와 후속 모임으로 만날 수 있는 주민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드림커뮤니티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아파트 잔디마당의 마을 축제다. 무인 택배보관소에 이은 두 번째 마을 골목인 셈.
"바로 옆 아파트 축제에서는 연예인도 불러서 홍보도 하고, 야시장도 뻑적지근하게 하더라고요. 근데 우리 아파트는 그 정도 예산이 없거든요. 각자 캠핑 의자나 텐트 같은 걸 가져와서 판매장을 꾸리고 벼룩시장을 열기로 했죠."
마을 축제에 할당된 예산은 레크레이션 강사비와 음향기기 대여료뿐.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주민 손으로 채웠다. 크기도 색깔도 가지각색인 캠핑용품과 '나에겐 필요없지만 누군가에겐 쓸모 있는 물건'들이 만들어낸 풍경은 그 다채로움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드림커뮤니티 회원 중에 두 가정이나 자녀 셋을 키우거든요. 그러니 작아진 옷이 많을 거 아녜요. 두 집에서 산더미 같은 옷이 나온 거지요. 또 어떤 분은 솜사탕 기계를 가지고 나오셨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다른 판매자들의 정리가 끝나고 나서도 몇 시간 동안 솜사탕을 만드셨어요."
임민아씨는 "준비할 땐 상상도 못 했던 풍경이 현장에서 벌어지더라"며 온 주민이 만들어낸 마을 축제의 놀라움을 말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물론 드림커뮤니티가 처음부터 모두에게 환대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드림커뮤니티의 공동체 활동을 설명하자 관리사무실은 "이런게 과연 될까"라며 반문했다. "몇몇 사람 취미활동 아니냐"는 날 선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주민들이 꾸준히 모이고 즐거워하는 풍경이 차츰 냉랭한 시선을 녹였다.
"마을 축제 준비할 때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운영에 서툴다 보니 관리소장님이 조언을 많이 해주셨어요. 전에 있던 아파트에서 마을 축제를 몇 차례 진행해 봐서 아신다면서요. 주말은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출근을 안하는 날인데 축제 현장에 오셔서 음료수도 챙겨주시고요. 엘리베이터마다 행사 홍보물을 붙여주신 것도 관리사무소 직원들이에요."
드림커뮤니티 공동체 활동을 탐탁치 않아 하던 주민도 마을 축제 마지막 일정, 잔디광장 영화상영회에 캠핑 의자를 들고 등장했다. 임민아씨는 "그때부터 활동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셨다"며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주민들의 호응이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고 말한다.
"신기한 게, 너무 애쓰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주민이 모이고 축제며 활동이 굴러가요. 어떨 땐 '운이 너무 따른다' 싶기도 하다니까요! 많은 이가 연결되고 싶고, 도움을 주고 싶은데 그걸 표현할 마땅한 계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엔 모른척 살피기만 하다가 마음이 동하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거 같고요."
운정신도시는 주민 평균 연령이 38.1세일 정도로 '젊은' 도시다. 전통적인 마을에서 기대되는 마을공동체를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이 아파트에서 벌어진 공동체 활동을 환영한 이유는 무얼까.
임민아씨는 "방송매체 또는 어른들의 입을 통해서만 마을공동체를 보고 듣던 이들에게 정책을 들이밀면 '이게 뭐야' 하는 반응"이지만 "직접 아파트에서 친구를 만들고, 같이 재밌는 일을 만들어가는 경험은 너무 좋아한다"고 그 이유를 말한다.
"해보면 좋으니까."
이 짧은 문장이 드림커뮤니티 활동을 가능케 한 배경이다. 올해 1월, 아파트 공동체에 참여한 이들이 자기 경험을 담은 책 <아파트에서 다정한 이웃을 만나기까지>(미디어랩 이유)를 발간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었다.
"마을 공동체를 이론으로 접하면 재미없는데 직접 경험하고, 실제 활동을 담은 이야기를 들으면 호기심이 일잖아요. 공동체 활동 내용과 운영 방식을 소개한 책보다 주민들의 생생한 경험이 담긴 책이 마을공동체를 확산하는 데 더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도 다정한 이웃으로
드림커뮤니티를 시작하면서 서로 약속한 사항이 있단다.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즐거울 수 있는 만큼만 하자"는 것이다. 분명 "힘들면 무조건 거기서 멈추자"고 했다는데 오히려 활동이 사라질까 두려워 더 열심히 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지난해 회계를 맡았던 룰루(정미애씨)가 재취업하면서 회계 일을 계속하기 어려워졌어요. 혼자 서류작업과 예산 집행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랬더니 뜨개쌤(이지연씨)이 먼저 나서 '룰루가 도와주면 내가 해볼게' 하는 거예요(웃음). 덕분에 경기도 공동주택 공동체지원 2년차 사업도 신청할 수 있게 됐죠."
아파트에 공동체 문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드림커뮤니티 활동가 대부분은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이다. 임민아씨는 공동체 활동을 통해 이들에게 찾아온 변화를 말한다.
"헬렌(박은화씨)은 자녀 셋을 키워요. 하고 싶은 것도 엄청 많은 사람인데 감당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혼자 끙끙 앓고 있었거든요. 근데 공동체 활동을 하며 고민 상담을 하기도, 손을 빌리기도 하면서 이번에 대학원 졸업까지 마쳤어요. 공동체 덕분에 해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해주더라고요. 헬렌 뿐 아니라 호랑(이서희씨)은 얼마 전 파주 작은도서관 파견 강사로 뽑혔고, 뜨개쌤도 복지관에서 뜨개 수업을 하고 있어요."
공동체 활동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나누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어낸 경험은 드림커뮤니티 모두에게 귀한 자산이 됐다.
"각자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것을 한 발씩 실현하는 것 같아요. 다시 사회로 나가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가지고요. 구성원들이 새로운 기회를 얻고, 또 성장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되게 기분이 좋아요."
1년간 공동체 활동으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 드림커뮤니티는 올해 색다른 시도를 궁리 중이다. 운정화성파크드림시그니처 아파트는 주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앱이 있는데, 게시물만 쓸 수 있을 뿐 댓글 기능은 막혀있다. 드림커뮤니티가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려는 지점이다.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서 마을 방송국을 해보려 해요. 아파트에서 살다 보면 불편도 생각도 정말 다양하잖아요. 주민들이 서로 물어보고 듣고 싶은 말이 많을 텐데 기존 소통 창구로는 일방적이거나 충분하지 않은 소통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불만을 쏟아내기보다 이런 부분을 같이 해결해 보자, 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요."
마을 방송국 운영 소식에 헬렌의 아들이 "방송국장을 한번 해보겠다"며 나섰다. 이에 청소년을 중심으로 방송국을 운영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새로운 상상을 이어내는 드림커뮤니티다. 지난해 봄과 가을에 열렸던 마을 축제도 매달 진행할 계획이다. "예산이 부족해도 우리끼리 테이블 놓고 놀면 그게 마을 축제이지 않느냐"는 임민아씨를 보니 분명 재미난 기획이 나올 듯싶다.
아파트는 현관문만 닫아도 손쉽게 바깥과 차단된다. 특히 바쁜 일상 가운데 이웃의 존재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런 공간에서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을지는 늘 '질문'으로만 남는다.
이에 임민아씨는 "아파트 공동체는 '희한한 유대감'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우연히 마주쳐도 인사를 해도 될까 말까, 고민하던 타인을 '우리'라고 부르기 시작하니 정말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공동체가 됐다는 것. 드림커뮤니티의 활동은 보통의 사람들이 만드는 보통의 이야기라 더 힘이 있다. 남몰래 다정한 이웃을 부러워하던 누군가에게 이들의 작당이 '나도 해볼까?'라는 용기가 돼 줄 수 있을 테다. 머뭇거리던 입을 움직여 다정한 인사를 전하고 이웃을 만나는 오늘을 기대해보자.
월간옥이네 통권 81호(2024년 3월호)
글 이혜빈 사진 드림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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