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홍 의병장 행장
안규홍(安圭洪) 의병장은 '담살이' 곧 머슴이었다. 그는 1879년 4월 10일,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 정씨는 먹고살기 위해 어린 남매를 데리고 이웃 보성군 문덕면 법화마을에 사는 고종 박제현의 집으로 옮겨갔다. 안규홍은 어려서부터 담살이를 하며 홀어머니를 지극 정성 봉양하는 효자로,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담력이 뛰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돼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게 되자 안규홍은 깊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탄식했다. 곁에서 함께 자던 이가 그를 위로하며 세상 되는 대로 살자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눈물을 뿌리며 "차라리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여 죽을지언정 오랑캐(왜놈)가 되어 살지 않겠다"고 말을 한 뒤 담살이 생활을 청산하고 의병 전선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길로 의병에 투신, 후일 안규홍은 전해산(全海山)·심남일(沈南一)과 더불어 호남 제일의 의병장이 되었다.
거괴(巨魁,'우두머리') 안규홍, 보성군 봉덕면(현, 문덕면) 법화촌, 31세. 융희 2년 4월 순천 부근을 점거한 강용언(姜龍彦)의 부장(副將)으로 있다가 동년 5월, 어떤 일로 해서 강을 원망, 그를 죽이고 스스로 수괴(首魁)가 돼 보성군을 중심으로 각 군(郡)을 날뛰었다. 그 세력이 한창일 때는 부하가 2백 명을 넘었고, 전해산·심남일과 나란히 폭도 거괴 중 첫째가는 인물이다. <전남폭도사> 137쪽에서
의병사에 금자탑을 세우다
1907년 전후 전라도 곳곳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더불어 의병을 가장한 도적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안규홍이 머슴을 살고 있던 보성 법화마을에도 도적을 방비하기 위한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에서 활동하던 안규홍은 국난을 당하자 평소 마음 속에 품어왔던 창의(倡義;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의 길에 나섰다.
"보성군 우산에 사는 안씨의 집에 머슴으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근간(부지런하고 성실히)하고, 매우 신실하기에 주인이 사랑하며, 이웃동네에까지 칭찬이 자자하더니 지난해 9월, 갑자기 주인을 하직하는지라 만류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가더니, 근처에 있는 머슴 일백여 명을 모집하여 연설하며 말하기를, '비록 우리가 남의 집 머슴살이지만 국민이 되기는 일반인데, 나랏일이 위급할 때를 당하여 농가에서 구차하게 살 것인가'하고, 의병을 일으켜 호남 남일(심남일)파와 합세하였다고 하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9년 1월 9일 자 '머슴꾼 의병'(고어를 알기 쉽도록 현대어로 고쳤음)
그때 안규홍을 따르는 자가 까마귀 떼가 몰리듯 하였다. 그들 대부분 머슴이거나 가난한 농사꾼들로, 그들은 고작 호미나 괭이와 같은 농기구를 가졌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유생들은 그들과 함께 창의하는 걸 수치로 알 정도였다. 유생들의 냉담한 반응에 재정 후원을 기대할 수 없어서 그는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관동사람 강용언(姜龍彦 이명 姜性仁) 의병 부대가 강원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의 진압을 피해 전라도 순천 일대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안규홍을 기꺼이 맞아들여 부장(副將)에 임명하였다.
강용언 의병장에게는 토착 의병 안규홍의 가세가 현지 지리에 어두운 약점을 보완해 주고, 또 지역 농민들과의 관계도 원만히 해결해 주는 등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강용언 의병장은 주민의 재물을 탐하고 성격이 포악하였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일인데, 일도 하기 전에 재물을 탐하고 백성에게 포악한 짓만 한다면 무슨 꼴이 되겠는가?"
안규홍은 강 의병장을 꾸짖었다. 하지만 강 의병장이 이를 듣지 않자 즉결 총살하였다. 강용언이 제거되자 비로소 군기가 바로 잡혔다. 안규홍은 여러 부하들의 추대로 마침내 의병장이 되었다.
안규홍은 서울에서 내려온 해산 군인 오주일(吳周一) 등 수십 명을 포섭하여 항일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곧 대장 안규홍을 비롯한 토착 농어민 출신은 지리에 밝고 지역 주민과 일정한 연고를 맺고 있었으며, 관동의병은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오주일 등 해산 군인들은 전술 전략에 이론과 실제를 골고루 갖췄기 때문이었다.
호남 3대 안규홍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의병부대는 1908년 음력 3월, 그가 머슴살이를 하던 법화마을과 가까운 동소산(桐巢山)에서 창의의 깃발을 드높였다. 안담살이 의병부대의 등장은 항일투쟁을 위해서라면 모든 계층이 서로 협력하는 상황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머슴 출신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비로소 양반 유생들이 가담한 획기적인 창의의 깃발이었다. 안규홍 의병부대의 주 근거지는 광양의 백운산으로, 그들의 투쟁 무대는 보성, 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과 순창, 남원 등 전북 동남부까지 그 세력이 미쳤다.
일제는 1910년의 한일병탄에 앞서 그 정지작업으로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을 펼쳤다. 이는 특히 전남지방 의병을 뿌리 뽑기 위한 의병 초토화 작전으로,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육지는 물론 해상에 이르기까지 물샐 틈없는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일군의 거미줄 같은 포위망이 시시각각 옥죄어 오자 안규홍 의병부대도 동요하여 투항하는 부하들이 속출했다.
1909년 9월 25일, 안규홍 의병장은 부장(副將) 염재보 등과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부하 가운데 일부는 끝까지 싸우다가 죽기도 하고, 체포되거나 투항하기도 하였다. 혹은 포위망을 뚫고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안담살이 의병의 해산과 지도부의 체포는 남한대토벌작전의 종료를 의미하였다. 비록 안규홍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으로 무너졌지만, 이 땅에 가난한 농민 중심의 의병부대로, 우리 의병사에 큰 금자탑을 세웠다.
일군에 체포된 안규홍은 광주에서 대구형무소로 이감된 뒤 이듬해인 1911년 5월 5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63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순국> 4월호에도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