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
본업은 사회과학책을 쓰는 작가이지만 곁다리로 와인 책을 내다보니 종종 도서관이나 사회단체 등에서 초청 받아 와인 강의를 한다. 업계 종사자들에 비하면 가진 지식이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지만, 좌충우돌 경험담에다가 애호가의 진심 두 스푼, 생계형 작가의 절실함을 세 스푼 반 정도 섞으니 다행히 재밌게 들어주신다. 그런데 질의응답 시간에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작가님, 지금까지 마셔 본 와인 중에 제일 비싼 건 얼마짜리인가요?"
행색이 허름하고 초라한 데다가 강의 내내 추천하는 와인이라고는 1만 원에서 3만 원 사이라 얕보인 것일까. 질문하는 이의 얼굴에는 '그래서 넌 학력고사 몇 점 맞았는데?'와도 같은 도발적 의도가 엿보인다. 그렇다고 먹어본 적도 없는 로마네콩티, 르루아 뮈지니를 언급하며 거짓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솔직담백하게 털어놓는다.
"한 병에 수백만 원 정도?"
묘한 웃음을 머금고 질문하던 이는 예상 밖의 답변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 역시 당황했을 것이다. '이 사람 은근히 금수저인가?' 사실 얼마 전에도 한 병에 백만 원을 훌쩍 넘는 고급 와인을 경험했다. 후훗.
비싼 와인이 맛도 다르긴 하네
때는 4월 2일 오후. JW메리어트 호텔 서울 3층에서는 신동와인 더헤리티지 2024 시음회가 열렸는데, 초대받은 와인 업계 관계자와 애호가 수백 명으로 현장이 바글바글했다. 이날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가장 비싼 와인은 헝가리의 명품 스위트 와인 로얄 토카이 에센시아 2009 빈티지였다.
일반 와인의 절반 용량인 375mL 한 병이 약 150만 원에 이르는 귀하신 몸이다. 특별한 와인이라 오후 세 시 정각에 선착순으로 줄을 서서 제공받았는데, 다른 와인을 마시다가 뒤늦게 허겁지겁 줄을 서다 보니 과연 영접할 수 있을지 간당간당했다.
소주잔 크기의 일회용 잔에 바닥만 채울 정도로 소량을 따라주니 내 순서까지 오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앞줄 세 팀 정도 남아있는 상황에서 아쉽게도 준비된 한 병이 소진되었다. 주최 측 관계자에게 다가가 병 안에 남은 한 방울이라도 어떻게 안 되겠냐고 사정했는데, 관계자가 병을 거꾸로 들어서 완전히 소진되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어휴.
여타 중저가 와인으로 아쉬움과 허탈함을 달랜 지 30분쯤 지났으려나. 로얄 토카이 에센시아의 점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그 끈끈하고 진득한 액체가 바닥에 조금은 고여있지 않을까 예상하며 빈 병이 놓여 있는 곳으로 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래의 사진처럼 당첨이다!
즉시 왼손으로 병 몸통을, 오른손으로 주둥이를 부여잡았다. 주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병을 뒤집어 주둥이를 입 위로 가져갔다. 병나발 그 자체. 점성이 있는 액체라 흘러나오는데 몇 초의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혓바닥 위에 떨어지는 방울만으로도 절륜한 기량을 가늠할 수 있었다.
향기롭고 눅진한 계피 향, 단맛과 산미의 완벽한 균형감, 한지에 먹이 스며들 듯 혀 위에서 운치 있게 번져나가는 방울 방울의 묵직한 존재감. 마음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일고여덟 방울 가까이 맛보았을까. 조금만 더 지속하면 열 방울을 채울 수 있었겠지만 너무나 남루한 행동 같다는 자각에다가 옆에서 기다리는 아내의 민망함도 신경 쓰여 병을 도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맛은 좋은 관계에서도 나오는 법
어느덧 사흘이 지난 4월 5일 오후. 장소는 JW메리어트 호텔과는 그야말로 대척점에 있는 나의 주 서식지. 눈앞에는 로얄 토카이 에센시아 2009 몸값의 약 2%에 불과한 이탈리아 와인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제나토 리파사 발폴리첼라 리파소 수페리오레 2018
Zenato Ripassa Valpolicella Ripasso Superiore 2018
와인 직구 사이트 위클리와인에서 할인 가격으로 구매했다. 제나토Zenato는 와인 회사명, 리파사Ripassa는 제품명, 발폴리첼라Valpolicella는 이탈리아의 와인 생산지, 리파소Ripasso는 고급 와인인 아마로네Amarone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재활용해 만든 와인을 의미한다. 수페리오레Superiore는 찌꺼기 중에서 그나마 품질이 좋다는 뜻.
그나저나 찌꺼기라니. 며칠 전 백만 원을 훌쩍 넘는 와인을 체험한 후 이래저래 아쉬움과 체념의 정서에 빠진 나로서는 뭔가 정서적 동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옆에는 주문한 찐만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만두와 발폴리첼라 리파소의 조합은 맛뿐만 아니라 의미적으로도 잘 어울린다.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이 심해서 강을 건널 수 없자 물의 신을 달래기 위해 인신공양 제사를 드리는데, 사람 대신 만두를 사용했다고 한다. 찌꺼기(발폴리첼라 리파소)와 대용품(만두)의 조합은 시작부터 B급 독립영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딸내미 주먹만 한 만두 하나를 집어 들어 반쯤 베어 물고 씹는다. 두툼하고 존득한 만두피를 찢고 들어가니 향긋한 부추와 두부, 돼지고기 등의 단백질이 어우러진 만두소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반겨준다. 본격적으로 저작운동을 시작하면 덩그런 만두소가 해체되고 파쇄되는데, 그 과정에서 뿜어내는 다채로운 질감과 풍미의 향연은 만두를 만두이게 만드는 정체성의 요체다. 이 집 만두는 특히나 부추를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게 참으로 만족스럽다.
이 요란법석한 만두소 파티는 구강 내에 광란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이때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러 와인이 등장한다. 우선 잔에 따라서 지긋이 향기를 맡았다. 고급 레드 와인에서 종종 감지되는 가죽 향이랄까 아무튼 그런 종류의 동물적 뉘앙스가 은은하게 깔려 있다.
한입 머금으니 이탈리아 와인 특유의 신맛이 잘 살아 있는 데다가 보랏빛 잉크를 떠올리게 만드는 균일하고 예쁜 맛이 난다. 풍미가 다채롭다거나 복합적이지는 않지만 단 하나의 색깔이더라도 곱디고와서 매우 인상적이다.
부추가 아무리 제 역할을 하더라도 두부나 고기에서 유발되는 잡내를 완벽히 잡아내기는 어려운데, 이 와인의 과실 향 가득 찬 풍성한 신맛은 마치 전문 청소팀과도 같아서 잡내뿐만 아니라 카오스 상태인 구강 내부를 말끔하고 상쾌하게 정돈한다. 찌꺼기와 대용품의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조화는 B급 독립영화관에서 간만에 명작을 찾아낸 것과도 같은 만족감을 선사한다.
사흘 간격으로 몸값이 50배 차이 나는 와인을 차례로 경험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비싼 와인이 맛있는 건 사실이지. 그동안 시음회에서 극소량을 영접한 값비싼 녀석들은 하나같이 끝내줬으니까.
하지만 나와 아내가 주방 식탁에서 두 시간에 걸쳐 도란도란 마시고 있는 이 한 병의 와인은 (시음회의 그 귀하신 와인보다) 우리와 훨씬 진중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가. 인간관계 또한 그러해서, 권력자나 명망가와의 스쳐 지나가는 만남보다는 가족, 동창생, 평범한 이웃과의 은근한 오랜 인연이 더욱 소중하기 마련이다.
길에서 연예인급 미모의 여성을 봤다고 갑자기 아내보다 더 사랑할 리는 없다. 남의 집 아이가 전교 1등 한다고 내 아이보다 예쁠 리 없다. 멋진 콘서트홀에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연주한다고 한들, 동네학원에서 고사리손으로 연습하는 딸아이의 서툰 피아노 연주만 하겠는가. 마찬가지다. 이 순간 우리 부부와 소중한 인연을 맺는 3만 원대 와인이 그림의 떡과 같은 값비싼 와인보다 심장에 남는 것은 당연지사다.
"작가님, 지금까지 마셔 본 와인 중에 제일 비싼 건 얼마짜리인가요?"
"음. 제가 모 시음회에서 말이죠. 백만 원이 훌쩍 넘는…"
이렇게 시작된 답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깨닫게 된 소중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