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
작가로 오래 활동하다 보니 깨달은 사실이 있다. 책이란 원래 안 팔리는 물건이며, 잘 팔리는 게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는 점이다. 이토록 안 팔리는 것을 굳이 공들여 편집해 주고 책의 꼴을 갖춰 시장에 내놓는 출판사(편집자)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패배할 줄 알면서도 함께 싸워나가는 전우, 그것이 작가와 출판사(편집자)의 관계가 아닐까.
이런 동고동락의 동지적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술이다. 차마 맨정신에 할 수 없는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역시 알코올의 힘을 빌릴 수밖에. 지난 4월 22일 월요일도 그런 타입의 날이었다.
작가와 편집자 모두 작정하고선 편집회의를 구실로 오전부터 술판을 벌였으니까. 작가 측 참가자는 부부 작가인 나와 아내, 출판사 측 참가자는 편집자 3인이었는데, 거사 전날 편집자와 주고받은 카톡 대화는 이 모임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최 과장 : "네. 오늘 안주 뭐 먹을지 마 과장님이랑 머리를 맞대고 회의했습니다. ㅋ"
나 : "가져갈 와인도 고민 중입니다. 혹시 미리 귀띔해 주시면 어울리는 와인으로다가 ㅎㅎ"
최 과장 : "도토리전, 도토리묵, 채식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류, 탕수육, 볶음밥 요정도입니다~ 혹시 이전에 먹었던 것 중 그리운 메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 "
나 : "네에~ 감안해서 와인 가져가겠습니다~"
(도토리묵에 어울리는 와인을 물색하던 중에, 다시 문자가 왔다.)
최 과장 : "메뉴 변경이요 ^^ 팟타이, 봄나물 파스타, 들기름 소바, 채소구이, 탕수육입니다~ "
나 : "넵~ 접수했습니다~."
무슨 와인을 들고 갈지 고민하다가 무심코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작년 8월에 서울 마포구의 와인 성지 '빅보틀'에서 사놓은 3만 원대 이탈리아 로제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라벨에 인쇄된 코뿔소가 인상적인데 미술에 조예가 깊은 아내 말로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라고 한다. 내가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면 상당히 유명한 화가인 건 분명하다.
라 스피네타 일 로제 디 카사노바
La Spinetta Il Rose di Casanova
적포도 품종인 산지오베제, 그리고 산지오베제의 클론인 프루뇰로 젠틸레 품종을 반씩 섞어서 양조했다고 한다. 로제 와인의 그 은은하다면 은은하고 어정쩡하다면 어정쩡한 양파 껍질 색깔은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침용(Maceration)이라는 와인 제조 공정을 통해서다. 적포도의 껍질, 씨앗, 줄기 등을 포도즙과 접촉하게 해 색소, 타닌, 향기 성분 등을 추출하는 과정이다. 침용을 길게 가져가면 레드 와인, 하지 않으면 화이트 와인, 어정쩡하게 하면 로제 와인이 된다.
로제 와인은 레드나 화이트와 비교해 생산량 및 소비량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비율로 따지면 대략 5~10% 정도다. 레드처럼 진득하지도 않고 화이트처럼 마냥 경쾌하지도 않은, 그 경계인과도 같은 어정쩡함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을 꼭 데려가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다.
잔에 담긴 로제 와인의 은은하고 투명한 붉은 빛깔은 산들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연분홍 철쭉만큼이나 봄을 떠오르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러니 4월의 모임에는 안성맞춤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최 과장이 카톡으로 알려준 메뉴에는 봄나물 파스타가 등장하는데, 분명 오일 베이스의 파스타일 것으로 예상된다, 2020년 4월 14일에 영접했던 로제 와인과 오일 파스타의 그 미칠듯한 저세상 궁합은 4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뇌리에 생생하다.
그래! 이 녀석을 가져가면 친애하는 전우들이 분명 만족할 거야. 하지만 아무래도 성인 다섯 명에 와인 한 병은 턱없이 부족하니 다른 두 병을 더해서 총 세 병을 가져갔다.
드디어 4월 22일 오전. 와인 세 병을 들고서는 아내와 파주 출판사 사옥에 도착했다. 우리 부부를 포함해 다섯 전우가 둘러앉은 탁자에는 전날 카톡으로 전달받은 예의 그 음식들이 즐비하다. 준비한 로제 와인을 개봉해 각자의 잔에 따라주고서는 기름기 좔좔 흐르는 파스타로 냉큼 젓가락을 가져갔다. 입에 넣고 꼭꼭 씹으며 음미하는데, 너무나도 익숙한 맛이 아닌가.
"이거 혹시 베OO의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 아닌가요?"
"오! 맞아요. 거기서 방금 사 왔어요."
"제가 이 파스타를 두 번이나 먹어봤거든요. 여기 진짜 맛집이죠."
고사리 특유의 담백하면서 졸깃한 식감에다가 시골 가마솥 누룽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들기름 특유의 구수함이 이미 맛있음 기준 초과지만, 거기에 '마카로~니', '모짜렐~라' 같은 찰진 이탈리아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쫀득한 파스타 면 또한 기대 이상이다.
한참을 파스타 맛에 홀려 있는데 잔 속 와인이 동향 친구(파스타)를 만나고 싶다며 얼른 구강 내로 투입하라고 성화다. 마, 알았다! 타지에서 친구를 만나니 그리도 반갑드나. 이리 온나. 한 모금 머금으니 입 안에서 화사한 산딸기 향이 퍼져나가면서 상큼한 신맛이 침샘을 자극한다.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올 정도로 흥겹고 발랄한 맛이다.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비생산적인 시간
폭발한 침샘을 달래기 위해서 들기름 고사리 파스타를 투하하고, 다시 로제 와인을 들이붓는 행위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문득 이 만족스러운 미식의 리듬에 어울리는 곡이 떠오른다. 바로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대표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다.
악보를 보면 진노랑색으로 표기한 저음부 선율과 주황색으로 표기한 고음부 선율로 구분했다. 진노랑색으로 표기한 선율은 오케스트라에서 주로 바순, 호른, 첼로, 바이올린이 담당하는데, 바이올린을 제외하면 대체로 묵직한 저음의 악기다. 나에겐 이 선율이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의 담백하고 고소한 맛과 겹쳐서 들렸다
주황색으로 표기한 스타카토 선율은 오케스트라에서 플롯, 오보에, 클라리넷, 바이올린 등 상대적으로 고음을 내는 악기들이 담당하는데, 재잘재잘 새소리 같은 청량한 가락이 상큼하고 화사한 로제 와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파스타 한입 로제 와인 한 모금 마시기를 반복하다가 순식간에 로제 와인이 바닥나 버렸다. 왈츠 연주가 중간에 강제 종료된 셈이다. 무척이나 아쉽다만 아무래도 다섯 명이 나눠 마시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긴 왈츠 리듬에 맞춰 계속 마셔댔다가는 인사불성이 되어 독거미(타란툴라)에 물렸을 때 춘다는 타란텔라(이탈리아 전통춤) 리듬을 타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전우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음주 속도를 조절하며 천천히 두 번째 와인을 열고…
오후까지 계속된 이날의 모임에서 책 제작과 관련된 구체적인 얘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저 눈앞의 음식과 와인을 섭취하며 인생만사와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나누다 보니 서로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목표 지상주의적이고 성과주의적인 사람은 이런 시간을 소모적이고 낭비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생산적인 시간을 일부러 함께할 수 있다는 건 이해 타산을 뛰어넘는 소중한 관계라는 증거가 아닐까? 생산적인 시간만으로 채워진 삶은 로제 와인 없는 파스타처럼 삭막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