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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 한국문화재재단 월간 문화재 갈무리
 
춘암이 평생 간직한 신조는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는 가치관이었다. 그는 평생 이 가치관에 충실했다. 

박인호는 1885년 충남 덕산군 가야산 동쪽의 막동리(현 예산군 삽교읍 하조리)에서 태어나 1940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동학인으로 그리고 동학이 천도교로 개칭된 뒤에는 끝까지 동학의 전통인 인내천과 자주·항일·통합의 정신을 고수하셨던 분이셨다. 그가 평생의 신조로 되뇐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라는 말은 그의 삶 그 자체였다. (주석 1)

마침내 호남에서 동학의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동학의 조직은 전봉준 등이 지휘하는 호남의 남접과 해월의 관할에 있는 북접으로 크게 나누어졌다. 내포 지역이 충청권이어서 북접에 속한 춘암 등 이 지역 출신들은 고부기포 초기에는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무장투쟁이라는 방법론에서 남북접은 견해 차이를 보였다. 

그러던 중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의 발발, 일본군의 동학군 학살이 자행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아무리 동학이 반봉건의 기치를 내걸었으나 왜적의 경복궁 침입과 동학도 학살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9월 18일의 총기포 이전의 내포지역 동학군의 움직임에 대한 일본군 첩자의 기록이다.

내포 지역은 청군과 일본군의 성환전투가 벌어진 곳과 멀지 않아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의 전투상황을 목격한 민중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군이 가담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4월 초 일본인 간자(間者)의 보고에 따르면 덕산과 예산에는 인민의 반수가 동학파라고 하여 동학의 교세가 컸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아직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전라도의 동학군과 교류하거나 지역에서 기포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예산과 덕산의 동학지도자가 2, 3명이며 이들의 평판이 좋은 편이다 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지도자의 평판이 좋아 교세가 신장되고 있은 상황이라고 보고하였다. 첩자가 보고한 동학의 지도자는 다름 아닌 춘암·박희인·이창구로 꼽힌다. (주석 2)

최시형을 정점으로 북접이 중심이 된 동학교단은 남접 중심의 무장봉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최시형은 각포의 두령들에게 9월 18일 충청도 보은의 청산(靑山)으로 모이라는 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총동원의 <초유문(招諭文)>을 발령했다. 다음은 그 요지이다.

                       초 유 문
  
선사(先師)께서 지나간 경신년(庚申年) 천명(天命)을 받아 도를 창명하여 이미 퇴폐한 강상(綱常)을 밝히고 장차 도탄에 빠진 생령(生靈)을 구하고자 하더니 도리어 위학(僞學)이라는 지목을 받아 조난순도(遭難殉道) 하였으니 아직도 원통함을 씻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31년이라. 다행히도 한울이 이 도를 망(亡)케 하지 아니하여 서로 심법(心法)을 전하여 전국을 통한 교도가 몇 10만인지 알 수 없으되 사은(師恩)을 갚을 생각은 없고 오로지 육적(六賊)의 욕을 일삼으며 척화를 빙자하여 도리어 창궐을 일으키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돌아보건데 이 노물(老物)이 나이가 70에 가까운지라 기식(氣息)이 엄엄하되 전발(傳鉢)의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이 옷깃에 차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도다. 이에 또 통문을 발하노니 바라건대 여러분은 이 노부의 마음을 양찰하고 기필코 회집하여 비성을 다하여 천위주광(天威黈纊)의 아래 크게 부르짖어 선사의 숙원을 쾌히 펴고 종국(宗國)의 급난에 동부할 것을 천만 바라노라. (주석 3)

최시형은 이 때에 하늘의 뜻에 이르렀음을 지적하면서 북접이 남접의 동학군과 합세하여 무장항쟁에 나설 것을 명령하였다. 이로써 동학혁명은 남북접이 함께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접 동학농민혁명군의 지역과 주도인물은 다음과 같다. (주석 4)
북접 산하 각지의 기포상황 북접 산하 각지의 기포상황
북접 산하 각지의 기포상황북접 산하 각지의 기포상황 ⓒ 김삼웅
 
때를 기다리던 북접 소속 동학도들은 9월 18일 각포 두령들의 지휘 아래 청산으로 모였다. 춘암은 서산의 책임자가 되어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는 신조를 되새기며 동학군을 인솔하고 동학혁명군이 되었다.


주석
1> 임형진, <참에 살고 거짓에 죽는다>, <내포 동학혁명과 춘암 박인호>, 간행사, 4쪽.
2> 성강현, 앞의 책, 57~58쪽.
3> <천도교백년약사>(上), 250쪽, 천도교중앙총본부, 1981.
4> 오지영, <동학사> 243~245쪽, <동학혁명백주년기념논총> (상), 동학혁명 100주년기념사업회, 54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박인호평전#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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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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