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가 주어졌다. 배가 브레머하벤 항에 붙어 있는 사흘 동안 어디든 다녀와도 된다는 선장의 허가였다. 기분 같아서는 어디도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남았다간 당직이다 뭐다 불려 다닐 게 뻔한 노릇, 일단 나가보기로 하였다. 목적지는 편도 3시간 거리인 함부르크. 몇 달 전만 해도 그토록 밟아보고 싶던 멋진 도시였다.
매순간이 새로웠던 푸른 바다가 막막하기만 한 망망대해가 되기까지, 필요한 건 단 몇 통의 메일 뿐이었다. 발신된 지 몇 개월씩 지난 메일들은 먼 바다를 떠도는 동안 내게 닥쳐온 현실을 일러주었다. 나는 당시 오래도록 만나던 애인과 헤어졌고, 많은 꿈을 걸었던 프로젝트는 표류하였으며,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내리고만 싶었지만 정식 항해사가 되기까진 아직 한 항차가 남아 있었다.
함부르크 근교에 도착하여 지하철로 갈아탔다. 첫 목적지는 시청사인 라타우스. 함부르크에 가면 꼭 들러야지 싶던 곳으로, 웅장한 외관 덕에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다. 햇살 좋은 가을날 알스터 호수 위를 달리는 지하철에 올라타니 서울에서의 출퇴근길이 엊그제 일처럼 스쳤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돼 나는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불쑥 화가 치밀었다. 어차피 알아듣는 사람도 없겠다, 절반쯤은 호기로써 절반쯤은 나도 모르게 욕설을 씹어내뱉었다.
바로 그때, 웬 백발 신사가 옆 좌석에 놔둔 웃옷과 배낭을 황급히 치우더니 비워진 자리를 팡팡팡 두들겼다. 뭔가 해서 보았더니 이리 오라는 손짓까지. 두리번거려도 근처에 선 건 나 혼자다.
가까이 다가서니 독일어로 뭐라뭐라 떠드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의 말을 끊고서 나는 관광객이고 독일어를 할 줄 모른다 하니 다시 영어로 유창하게 이야기를 걸어온다. 자긴 함부르크 사람이고 시내에 있는 사무실에 가는 길이라며, 보아하니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혹시나 필요한 게 있다면 주저 말고 말하란 것.
설마 이 인간 내 욕을 알아들은 건가 싶어 한국말을 아느냐고 물으니 전혀 모른다고. 도대체 내 표정이 얼마나 어두웠기에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이 걱정을 하는가 싶어 되레 미안해졌다. 그렇게 트인 대화는, 그와 함께 걸었던 거리는, 그가 건넨 겨우 절반 정도만 알아들은 이야기들은 내게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오래 전 만남 떠오르게 한 감성적 소설
단편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는 동안 수차례나 그 날의 만남이 떠올랐다. 그와의 짧은 만남이 아니었다면 남은 두어 달의 항해가 훨씬 더 고단하였을 테다. 어쩌면 여적 잃지 않은 어느 귀한 것을 영영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모두 일곱 편의 짧은 소설이 실린 단편집은 빛, 그것도 아주 희미한 빛을 말한다. 그러나 그 희미한 빛은 그래도 빛이 된다. 없다면 말 그대로 어둠이었을 것을 밝혀낸다. 기능한다. '으로도'라는 조사의 결합은 이 희미한 빛이 제 역할을 하였음을 내보인다. 그렇다면 된 것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무엇이 된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이 단편집의 주제다. 일곱 편의 작품 가운데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표제작으로 정한 건, 이 작품에 다른 작품들을 묶어낼 수 있는 대표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이 같은 추측은 작품을 한 편 씩 읽어내는 동안 사실로 확인된다.
주인공은 한때 위태로웠고 여전히 안 위태롭지는 않은 서로 다른 여성들이다. 이들은 삶 가운데 나름의 결핍을 가진 이들로, 각자의 방식으로 그 결핍을 견디고 겪어낸다. 특히 그들 각자가 지탱하기 어려운 삶의 어느 곡절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힘을 얻는다. 힘겨워하는 이도, 힘을 주는 이도 모두 여성으로, 소설은 여성이 마치 무작위적으로 선택된 듯 보이는 다른 여성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하여 마침내 오늘을 버텨낼 힘을 갖는 모습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낸다. 말하자면 여성과 여성의 연대, 그 느슨하고 희미한 연대만으로도 어느 인간은 일어설 힘을 얻게 된다는 것, 그것이 이 소설들이 전하는 이야기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대학교 영문과 강사와 수강하는 학생 간의 관계를 비춘다. 매 시간 강사가 선정한 영문 에세이를 읽고 그에 대응하는 에세이를 쓰는 것이 이 수업의 방식이다. 여느 강사와 학생 같았던 관계는 돌발적 사건을 계기로 특별한 무엇으로 화한다. 갑자기 생리가 터진 주인공이 강사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면서다. 겉옷을 빌려 생리혈을 가리고 강사의 집까지 동행해 옷을 갈아입는 경험, 그 뒤 둘은 서로에게 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겉으로는 여전히 강사와 학생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그 베풀고 받음이 둘을 여느 강사와 학생으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연대
학생은 강사를 동경하고, 강사 또한 학생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는다. 서로의 내밀한 구석을 조금씩 알아갈 밖에 없는 한 학기 강좌를 거치며 쉽게 이름 지을 수 없는 감정이 피어나고 자라난다.
소설은 학생에겐 대단하게 보였던 강사가 현실의 장벽 앞에 고전하고 있음을, 또 상당한 시간이 흘러 그 강사의 위치에 선 학생이 아마도 먼저 강사가 느꼈을 벽을 마주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여성과 여성의 연대가 공고한 장벽과 마주해 나름의 힘을 발휘하는 모습을, 그러나 엄존하는 현실이 그 연대를 위협하는 과정을, 이 소설은 여러 각도를 통해 내보인다.
연대와 지지를 그렸다곤 하지만 모든 관계가 현실의 벽을 부수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벽 앞에 절망하고 무릎 꿇는 모습으로 그려질 때가 많다. 누구와도 다른 시각을 보이던 재능 있던 여자가 더는 글을 쓰지 않게 되고(몫), 정규직과 인턴이란 경계를 끝끝내 넘지 못한 채 어느 귀한 우정이 단절되기도 한다(일 년). 하지 않은 일의 죄를 받아 교도소에 갇힌 채 전하지 못할 편지만 쓰거나(답신), 가장 가까운 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오랫동안 껍데기뿐인 관계를 이어가기도 한다(파종).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귀한 이를 떠나보내며(이모에게), 가장 가까운 이들과의 완전한 단절을 새삼 확인한다(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그러나 소설은 그저 단절과 절망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어느 재능의 소실을 함께 목도했던 이들이 온기를 나누고(몫), 단절됐던 우정이 늦게나마 복원되며(일 년), 결국 찢어버릴 편지라도 어떻게든 쓰여지리라는 믿음을 확인한다(답신). 무너질 듯했던 관계가 공유되는 추억으로 이어지고(파종), 떠나간 뒤에도 남아 있단 걸 확인하는 일(이모에게). 딸들과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무색하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른 여성들과의 우연한 유대가 눈물을 핑 돌게끔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고 있자면 인간이란 정말이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일어설 수가 있는 존재구나, 그런 믿음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최은영은 오로지 여성들의 연대를 반복하여 말하지만, 비단 여성만의 이야기라고만 할 수는 없을 테다. 소설 속 남성들이 대부분 비루하고 저열하게 그려진단 점이 남성 독자로서 답답한 감상을 갖도록 하는 게 사실이다. 딸을 남의 집 부엌데기로 팔아치우고, 어린 여자애를 착취하며, 미성년자와 성매매를 하고,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들. 딸에게는 재산을 주지 않으려 수를 쓰고, 뛰어난 여자의 재능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며, 불공평한 가사노동을 강요하는 남자들.
그러나 이 모두가 누군가의 삶에선 엄연한 사실일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를 넘어 이 소설이 그린 연대의 가능성이, 희미한 빛의 연결이, 그저 어느 성별을 넘어 인간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나는 믿고자 한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충분한 날이 있다
나는 몇 분 전까지 그저 배경이었을 뿐인 어느 독일 아저씨와 한적한 지하철 칸에 나란히 앉아서 알스터 호수와 엘베강을 건넜던 적이 있는 것이다. 그가 내게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를 물었고, 나는 내가 좋지 않은 일이 있기는 한데 당신이 해결할 수는 없을 거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살다보면 그런 날도 있는 거라며 알스터 호수와 엘베강, 마침내 함부르크 도심 전경이 저 멀리 보일 때까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윽고 엘베강 풍경이 저만치 사라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함부르크는 참 아름다운 도시야, 저쪽은 더 그렇지"하고 지나온 강 저편을 가리켰다. 그 모습과 말투가 몹시 다정해 한참이나 나는 그가 가리킨 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더는 강 저편이 보이지 않을 때쯤 내가 그에게 물었다. "마음이 좋지 않은 날 함부르크에서 단 한 곳만 가볼 수 있다면 어딜 가겠어요?" 그는 조금 고민하는 척하더니 "그럼 미술관을 가야지"하고 답하였다. 그림은 마음을 다친 사람에게 특히 잘 듣는 법이라며, 함부르크엔 좋은 미술관이 여럿이라고 이름까지 줄줄 읊어댔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마음이 좋지 않은 날이면 미술관에 간다.
그는 제 사무실을 한참이나 지나쳐 나를 라타우스 광장까지 데려다주었고, 다시 지하철역 안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어쩌다 만난 이국의 청년이 얼마나 안쓰러워 보였기에 그리도 다정하게 말을 걸었나 싶어서, 나는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끔은 이토록 작은 만남 하나가 하루를, 또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기도 한다. 어쩌면 그보다 많은 것까지도. 그러니까 내게도 아주 희미한 빛이 비추었던 적이 있는 것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충분했던 날이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