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 업무 도중 희생자와 제가 계속 겹쳐 보였어요."
박동찬(26)씨의 말엔 막힘이 없었다. "제 한국말이 어색하지 않나요?"라는 그의 물음에 절로 손사래가 쳐질 만큼. 1996년 중국에서 태어났고 2015년에야 한국에 넘어왔다는 건 그가 말하지 않는 이상 예상하기 어려운 이력이었다.
박씨는 중국 동포 5세다. 한국에 와 연세대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석사과정 중이다. 그의 명함엔 특이한 직함이 적혀 있다.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 소장. 바로 옆엔 '평등과 환대, 연대와 마주침'이란 문구가 담겨 있다.
아리셀 화재 참사 직후 박씨는 화성으로 내달렸다. 그의 명함에 적힌 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몫을 위해, 그리고 평등, 환대, 연대, 마주침을 위해. 그는 참사 후 한 달이 지난 시간 동안 중국인 희생자 유가족의 통역 업무를 맡고 있다.
아리셀에서 숨진 23명 중 17명이 중국인이다. 이주노동자 상담을 꾸준히 해 오고 있는 그도 "이런 집단 참사는 없었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위험의 외주화를 넘어 위험의 외국인화를 상징하는 이 참사의 희생자들에게서 누구보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그도 자신을 보았다.
박씨는 "우리(한국)도 한때 노동자들을 외국으로 보냈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다"며 "우리 윗세대가 다른 나라에서 겪었던 차별과 고생, 수모를 조금이라도 떠올려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이 참사는 외국인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 18일 오전, 유가족들이 모여 있는 경기 화성시 모두누림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화성시, 2차 가해에 대대적 언론플레이"
- 어떻게 아리셀 참사 유가족의 통역을 맡게 됐나요.
"참사(6월 24일) 이튿날 아리셀 참사 소식을 접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피해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본격적으로 '이 사안이 심각하다'고 인식한 건 지인들, 기자들로부터 '중국 동포가 많이 희생됐다', '동포 커뮤니티에서 그 가족을 찾을 수 없냐'는 연락이 오면서부터였죠.
6월 말부터 중국에서 유가족들이 입국하기 시작했어요.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분들이 있었어요.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산업재해, 법 용어는 어렵잖아요. 그래서 비슷한 시기 꾸려진 아리셀산재피해가족협의회(가족협의회)와 아리셀중대재해참사대책위원회(대책위)에서 통역을 도와야겠다 생각했어요."
- 지난 11일 화성시청 앞 시민추모제 발언 중 "이번 참사처럼 힘든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서울의 한 외국인 주민지원기관에서 매주 3일씩 이주 노동자들의 고충을 상담하고 있습니다. 산업재해 관련 상담도 꾸준히 해왔는데, 아리셀 참사 같은 집단 참사는 없었어요. 특히 세월호, 이태원, 오송지하차도 참사 등에 이어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변을 당한 거잖아요. 또다시 '한국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저도 이주민 당사자다 보니 희생자와 유가족 입장에 공감하게 됐습니다. 특히 희생자, 유가족 중 저와 제 부모님 또래인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통역 업무 도중 희생자와 제가 계속 겹쳐 보였고 유가족의 사연을 가장 가까이에서 접하다 보니 슬픔이 배가 되더라고요."
- 시민추모제 당시 "화성시와 아리셀이 말하는 그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그대로 옮길 수 없었고 피해자 가족의 격한 감정을 그대로 옮길 수도 없었던 나는 통역사의 자격이 없다"라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화성시는 지난 10일부터 희생자 친인척에 대한 숙식 지원을 중단했어요. 동시에 '유가족을 왜 세금으로 지원하냐'는 부정적인 여론도 형성됐습니다. 사실 그들에게 세금을 투입하는 게 아닙니다. 화성시가 추후 사측에 구상권을 청구해 그 비용을 받아내는 거예요. 그래서 대책위가 '지원 중단은 부당하다'는 의견을 냈죠. 그런데 화성시로부터 '지원 비용을 보존한다는 약속을 아리셀로부터 받아 오라'는 식의 답이 돌아오더라고요.
또 두 희생자가 부부인데 신원 확인이 늦어 다른 장례식장에 안치돼 있던 사례도 있었어요. 유가족이 뒤늦게 인지하고 화성시에 '가는 길 만큼은 같이 갈 수 있도록 한 장례식장에 안치해 달라'고 요청했죠. 그런데 화성시는 '운구 비용을 유가족이 부담하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답했어요. 유가족의 항의로 화장 직전 한곳에 안치되긴 했지만 이미 큰 상처를 받았죠. 이처럼 화성시는 유가족에게 2·3차 가해를 가하고 대대적인 언론플레이를 합니다. 이런 내용을 통역하는 게 참 힘들었어요."
- 사측의 입장을 통역해 전달할 때는 어떤 점이 어려웠나요.
"사측은 1차 교섭(지난 5일, 30분간 진행) 이후 지금까지도 2차 교섭에 전혀 임하지 않고 있어요.
유가족에게 보상·합의 제안서를 문자로 계속 보내오는데 내용이 어처구니 없습니다. 한국인 희생자 유가족에게 '처음 7년은 내국인 기준, 이후 65살까지는 중국 길림성(지린성) 현지 근로자 임금으로 보상하겠다'라는 문자를 보내는 식이죠.
중국인 희생자 유족에게도 이러한 보상 제안은 맞지 않습니다. 중국 동포 희생자들이 가지고 있던 비자는 대부분 F-4(재외동포) 비자였어요. 3년을 주기로 연장 가능한 사실상의 영주권이죠. 그럼에도 사측은 7년 후 희생자들이 중국으로 가서 일할 거라고 가정한 겁니다. 그들은 '언제까지 합의하면 추가로 보상금을 더 주겠다'는 식의 말도 합니다. 아직도 사람 목숨을 거래로 여기며 흥정하는 거죠."
- 유가족의 입장을 사측이나 화성시에 전할 때는 어땠나요.
"현재 유가족들은 언어 능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한 상태로 보입니다. 산업재해로 가족을 잃은 게 처음이고 황망하다 보니, 사측이나 화성시 입장에 반박할 방법을 스스로 고민해 내기 쉽지 않을 거예요. 또한 분노에 차면 발언 중간에 눈물을 흘리거나 맥락이 끊기기도 해요. 이러한 분노, 슬픔을 전하는 동시에 발언의 맥락까지 담아 통역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보상금 달라 떼쓴다? 왜 퇴근하지 못했는지 알고 싶을 뿐"
- 유가족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나요.
"최근 여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사측 책임자들을 추가로 고소·고발했고, 고용노동부의 소환조사에도 임하고 있어요. 향후 경찰에서 소환조사를 요청하면 거기에도 임할 의지가 있고요. 지난 16일부터는 유가족들이 순번을 정해 화성시청 1층 분향소를 지키고 있어요.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데 사건이 묻히는 것을 굉장히 걱정하고 계십니다. 사측의 협상, 제대로 된 조사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나 집회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 한국의 이주 노동자 수는 매해 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요.
"정부는 이들에게 안전한 작업 환경을 제공할 책임이 있어요. 언론에 따르면 아리셀 공장의 경우 이전에도 몇 번 화재가 있었지만 재발 방지 대책, 안전관리 체계 등이 마련되지 않았어요. 군납 배터리의 불량률이 너무 높았다는 보도도 있고요. 지자체와 고용노동부 등이 제대로 단속하고 대책을 마련했다면 이번 참사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중대재해처벌법을 누더기로 만든 정치권에도 책임이 있어요. 법이 만들어졌지만 50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이 유예됐었잖아요. 아리셀이 지금 희생자들을 두고 '우리 직원이 아니라 메이셀(하청업체) 직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예요. 그런 부분들이 개선돼야 해요."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요.
"이 참사는 외국인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같은 체계에서는 누구든 일하다가 죽을 수 있습니다. 유가족들은 그 원통한 죽음의 행렬을 멈추고 싶은 것이고, 이윤밖에 모르는 자본의 무도한 질주를 멈춰 세우고 싶은 겁니다. 또한 유가족들이 보상금을 더 달라고 떼쓰는 사건도 아닙니다. 유가족은 일하러 간 가족이 왜 귀가하지 못했는지, 왜 작업장에 제대로 된 소화 장비가 구비되지 않았는지, 왜 유일한 피난 통로에 리튬 배터리가 적재되어 있었는지 알고 싶은 거예요.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고 싶은 거죠.
지금은 한국 사회에 이주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지만, 우리도 한때 노동자들을 외국으로 보냈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1960년대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 1970년대 중동 파견 건설 노동자가 그랬죠. 독자 여러분께서도 우리 윗세대가 이국에서 겪었던 차별과 고생, 수모를 조금이라도 떠올려주세요. 그렇다면 아리셀 참사 희생자들과 이주 노동자들이 겪는 아픔에 조금이라도 더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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