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4일 오전 10시 30분. 작은 배터리에서 난 연기가 42초 만에 공장을 가득 메웠다. 그 짧은 시간 동안 23명의 소중한 삶이 사라졌다. <오마이뉴스>는 숫자 '23명'이 아닌 그들 한 명, 한 명의 삶을 전한다.[편집자말] |
중국동포(조선족)인 강규동(87)·김분옥(80)씨 부부는 중국 흑룡강성(헤이룽장성) 목단강과 길림성(지린성) 연변 일대를 오가며 50년 넘게 벼농사를 지어 네 남매를 키웠다. 강길복(61)·강영남(56)·강순복(52)·강금복(47). "평생을 조선 부락에서만 산" 강씨 부부는 네 남매를 모두 조선학교에 보냈다.
노부부는 한국말이 자유로웠는데, 중국말은 잘 못한다고 했다. "근데 가들은 조선말, 중국말 다 잘해요." 특히 김분옥씨는 경상도 말씨를 썼다. 목단강에는 경상도 출신들이 많이 모여 산다고 했다. 북한 지역에서 태어난 강규동씨는 두 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노부부는 70대 들어 기력이 다해 농사일을 그만뒀다. 대신 장성한 네 남매가 각자 다달이 20~30만 원씩 생활비를 보내왔다. 네 남매는 모두 한국으로 떠나 있었다. 네 남매 중 가장 먼저 한국으로 간 건 둘째 아들 영남씨였다. 영남씨는 2007년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동탄 제1신도시 개발이 한창이던 화성의 아파트 공사장들을 돌며 건설 일을 했다. 이후 용인의 대형 장작구이 오리 고깃집, 철제 공장, 빈티지 가구 공장 직원을 거쳐 지금은 수원에서 일용직으로 건설현장에 나간다고 했다.
영남씨가 정착하자, 첫째 딸 길복씨와 셋째 딸 순복씨도 한국으로 향했다. 12년 전쯤이다. 길복씨는 서울에 있는 호텔에서 직원 급식을 담당하는 조리사로 근무하고 있다. 서울 신림동에 집을 구한 순복씨는 서울 서초구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 김밥집에서 8년 동안 일하며 부모님께 돈을 부쳤다.
"동생이 하도 하루 종일 서서 김밥을 많이 말아서리, 팔뚝이랑 장딴지 근육이 어지간한 남자를 초과했었지요." 영남씨가 공사장에서 그을린 자기 팔뚝을 누르며 말했다. "나이 먹고 김밥은 너무 힘들다고서리, 이젠 고조 앉아서 하는 쉬운 일 좀 하고 싶다고 동생이 직업소개소를 알아봤지요."
김밥집을 나온 순복씨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사탕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일용직인 영남씨가 일거리가 없어 쉴 땐 동생 순복씨가 오빠에게 사탕 공장 일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순복씨도 지난해 말 사탕 공장을 퇴사해야 했다. "잔업이 적어서리 돈벌이가 작더래요." 영남씨는 동생 순복씨가 6~7개월째 화성의 다른 공장에 취직해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무슨 공장인지는 알지 못했다고 했다.
막내 딸 금복씨가 한국에 온 건 언니 순복씨가 사탕 공장을 떠나 새 직장을 구하던 작년 말 무렵이었다. 그전까지 중국에서 주부로만 살아온 금복씨가 한국행을 결심한 건 열여덟살 된 딸 때문이었다.
"금복이 딸은 어릴 때부터 머리가 비상해서 5살에 베이징에 가 영어시험도 치고 그랬지요. 금복이가 학원도 엄청 데리고 다니고 교육에 신경 많이 썼더래요. 근데 그 딸이 이제 다 커서 영국으로 유학 보낸다고, 돈이 더 필요하다고 남편 따라 온 게지요. 지금껏은 고조 금복이 남편 혼자 한국에서 인테리어 일을 했거든요."
영남씨의 설명에 어머니 김분옥씨가 고개를 떨궜다. "금복이 가가 작년까지 중국에서 우릴 많이 돌봤지." 김씨가 말했다.
"우리는 중국에 있어도 계속 영상 통화를 하니까 자식들이 항상 옆에 있는 것 같았지요. 야들은 이틀을 안 넘기고 연락이 와요. 거기다 금복이 가가 한국 간 지 얼마 안 됐는데, 순복이랑 같은 공장에서 일한다고 그랬어요. 늦게 떠난 막내가 언니랑 같이 있다니까 걱정을 덜 했지요."
순복씨와 금복씨가 함께 일했던 곳은 경기도 화성 아리셀 공장이었다.
"달아나라, 한 마디만 했어도"
오빠 영남씨도 후에 두 동생이 함께 일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어느 공장인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다들 사느라 바쁘니까서리. 순복이는 아리셀에 한 6~7개월 다녔을 거고, 금복이는 아리셀에 한 3개월 정도밖에 안 다녔을 거지요. 금복이는 아마 순복이한테 얘기 듣고 들어갔겠지요. 둘이 셔틀버스도 같이 탄다고 했지요. 아침에 7시 넘어서 정왕동에서 회사까지 셔틀버스가 있다고서리. 순복이는 신림동에서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으로 이사를 했고, 금복이 집은 안산시 상록구였거든요. 금복이가 그거 타려면 정왕동까지 또 지하철 타고 가야 한다고, 아침 5시 반이면 나간다고 했었지요."
6월 24일, 영남씨는 수원시 망포동에 있는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일이 끝나가던 오후 4시쯤 핸드폰을 봤는데 첫째 누나 길복씨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있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누나는 울고 있었다.
"누님이 그날따라 호텔 직원 급식 일이 휴무여서 집에서 TV를 보는데, 아리셀이라는 회사에서 불이 났다는 거예요. 거기가 순복이, 금복이 회사라는 거예요. 나는 그때까지도 별 다른 생각이 없었어요. 고조 '아니 애들 다 빨빨하고 한국말 잘하는데 불 났으면 피난했겠지요, 누나' 했지요. 끊자마자 동생들한테 전화해봤어요. 둘 다 안 받는 거예요. 어? 늘 오빠 연락은 받는 애들인데? 그때부터 마음이 불안했지요."
영남씨는 곧장 누나와 함께 화성 아리셀 공장으로 갔다. 아직 연기가 나고 있었고 경찰들이 많았다. 두 동생 모두 죽었다는 거였다.
"말이 안돼요. 내가 답답해서 CCTV를 수십 번 봤지요. '달아나라' 한마디면 다 살았지요. 불 났는데 직원들이 앉아서 보고 있잖아요. 이 배터리라는 게 위험하다는 거, 불 나면 달아나야 한다는 거, 회사가 천상 한 번도 말 안 했다는 거지요. 유독가스가 저렇게 금방 나는 거면 하다못해 공장에 방독마스크라도 있었어야 할 거 아니에요. 불 나면 어떻게 하라 일러주고, 안전 장치만 좀 있어도 사람들 이렇게 많이 죽지 않는다 말이에요."
두 동생의 신원을 확인한 영남씨는 6월 28일 급히 중국으로 갔다. 이 사실을 모르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전화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갔는데 벌써 엄마, 아부지가 좀 의심하더라고요. 워낙 순복이, 금복이가 자주 연락을 해놓으니까서리. 무슨 일 있냐고요. 며칠째 소식이 없다고. 그래서 순복이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는데, 살아날 확률이 좀 낮다고 내가 둘러댔지요. 차마 둘 다 일하다 돌아갔다고는 얘기 못하고…"
6월 29일, 노부부는 아들 손에 이끌려 화성에 도착했다. 병원으로 간다던 영남씨가 데리고 간 곳은 이상하게도 화성의 한 모텔 방이었다. 화성시청에서 아리셀 참사 유가족들에게 제공한 거처였다.
"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엄마, 아부지께 솔직하게 다 말씀 드렸지요."
영남씨가 눈물을 터뜨렸다.
두 딸 잃은 87세 아버지의 말 "너네들, 수고 많았다"
지난 1일 그 모텔 방에서 강규동씨와 김분옥씨, 그리고 아들 영남씨를 만났다. 아리셀 참사로 고 강순복·금복 자매가 사망한 지 40일이 넘었지만 가족들은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언제 지원이 끊길지 모를 모텔 방에서 한달째 머물고 있었다. 여전히 회사의 제대로 된 사과와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말수 적은 농부였던 아버지 강규동씨는 "아들한테 얘기 듣고 처음 열흘 동안은 니 정신인지 내 정신인지 몰랐다"고 표정 없이 말했다. 강씨는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냐'는 질문에 "이때까지 가족 빼고 우릴 찾아온 건 당신이 처음"이라고 했다.
"아… 놀랐죠. 더 말할 것도 없죠. 하나도 모르겠는데 둘이가 한 번에… 기가 막히지요. 이런 일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지요… 필요한 게 없어요. 자식 둘이 잃어졌는데."
어머니 김분옥씨는 모텔 침대에 걸터앉아 "더 말할 게 없는 딸들이었다"며 주름진 손으로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가들 둘 다 영 잘했어요. 우리가 가들한테 의지했고. 이리 끔찍한 일이 어디 있어요."
영남씨는 아리셀 측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조선족이라고 차이 놓고, 등급 놓지 말았으면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 다릅니까. 이 유가족들, 이렇게 하루하루 지쳐가는 모습 그만 보고, 제발 하루 빨리 교섭에 나와서 이 일 해결했으면 합니다. 벌써 한달 가까이 교섭에 안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동생들, 정말 착한 애들이었지요. 우리 형제들은 남 욕할 줄도 모르고 살았지요. 왜냐면 우리 자식들이 한 번도 엄마, 아부지가 싸우는 걸 못 보고 컸거든요. 그런 순한 애들을 죽였잖아요."
영남씨는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말 없이 아들을 바라봤다. 아버지 강규동씨가 오랜 침묵을 깨고 딸들에게 전하는 듯 천천히 말했다.
"고조, 어쨌든… '너네들 수고 많았다. 이제 좋은 데로 가서, 시름 놓아라.' 이렇게 말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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