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
와인을 마시는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그 목적은 단 하나, 더 나은 기분을 위한 것이다. 직장 상사에게 질책받았을 때, 연인과 다투었을 때,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 때, 중요한 시험에 합격했을 때, 와인은 나의 위장으로 들어와 죽마고우처럼 세포들을 위로하고 다독이고 격려하고 축하해준다. 그 과정에서 도파민과 엔도르핀 분비가 촉진되어 혈중 '행복감' 농도가 증가한다. 물론 혈중 알코올 농도가 동반 상승하는 부작용이 따르지만.
와인을 마시는 이유 중 날씨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날씨의 변화는 인간의 기분에 상당한 수준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심지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해변의 강렬한 햇빛과 무더위로 기분이 나빠져 살인까지 저지르지 않는가. 만약 주인공이 그 유명한 부르고뉴 샤르도네 '뫼르소'를 시원하게 마셔 날씨의 영향을 상쇄했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계절에 따른 음주량의 변화를 살펴보면, 추운 날씨가 지속되는 겨울철에는 사람들이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음주량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특히 연말연시와 같은 축제 기간에는 음주가 증가한다. 한편 여름에는 따뜻한 날씨와 함께 야외 활동이 늘어나면서 음주 기회가 많아진다. 특히 야외 바비큐, 해변 파티 등에서 음주가 빈번해진다. 또한 기온이 낮을 때 사람들은 음주를 통해 체온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더운 날씨에는 시원한 음료를 찾게 되면서 음주가 증가하기도 한다.
아니 이건 뭐 우울해도 마시고, 슬퍼도 마시고, 기뻐도 마시고, 추워도 마시고, 더워도 마시고, 그야말로 사시사철 에브리데이 마신다는 얘기 아닌가. 몸이 아프면 약을 먹는다는 얘기와 다른 게 뭐가 있나? 써놓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물의를 일으켰다면 미안하다. 다만 증세에 따라 처방하는 약이 달라지듯이, 날씨와 기분의 변화에 따라 음용하는 와인이 달라야 함은 한낮의 태양이 뜨거운 것만큼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날씨-와인 페어링을 제안하겠다.
■ 비도 오고 뭔가 감정적인 날
돈나푸가타 안씰리아 (가격 2만 원대)
와이너리 이름인 돈나푸가타(Donnafugata)는 이탈리아어로 '도망간 여인'이다.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를 의미하는데 19세기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페르디난도 4세의 아내다. 남편에게서 도망간 건 아니고 위풍당당한 나폴레옹 군대를 피해 시칠리아의 한 건물에 머물렀는데, 지금의 와이너리 건물이다. 라벨에는 눈물 한 방울을 흘리는 아름다운 여성(마리아 카롤리나)이 그려져 있다.
비도 오고 뭔가 감정적인 날이면 이 와인에다가 부추전, 감바스 알 아히요를 곁들이면 어떨까. 시칠리아 토착 품종인 카타라토와 안소니카가 블렌딩됐는데 사과, 배, 복숭아가 떠오르는 은은한 과실 향에 신선하고 경쾌한 산미가 부추전과 감바스 알 아히요의 기름기를 말끔하고 상큼하게 씻어내린다.
창밖 빗방울을 한참 바라보다가 와인 라벨 속 여인으로 눈길을 돌리면 무려 나폴레옹 군대에 쫓기는 이 사람의 신세보다는 내가 그래도 낫지 않나 싶어 묘한 안도감이 든다.
■ 태풍이 오는 불안한 날
몰리두커 블루 아이드 보이 (가격 6만 원대)
와인 라벨에 아이 한 명이 등장하는데 몰리두커 와이너리 설립자의 자식이다. 블루 아이드 보이는 파란색 눈이 예쁜 자기 자식을 일컫는 명칭이다. 생각해 보라. 라벨과 명칭에 자식을 새겨넣은 와인을 그 어느 부모가 대충 만들 수 있겠는가. 블랙베리 향과 초콜릿 향, 강렬한 타닌, 높은 알코올 도수가 휘몰아치는 풀바디 와인이다. 호주 시라즈 품종의 매력을 한껏 뽐낸다.
태풍으로 비바람이 몰아쳐 창문 유리창이 깨질까 노심초사하는 저녁 시간. 아이들은 천둥번개 소리가 무섭다고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그럴 때면 진득한 바비큐 소스가 발라진 고기에 이 와인을 즐기면 어떨까.
입안에서 휘몰아치는 맛의 태풍 덕분에 창문 밖 태풍은 어느덧 쭈그리가 된다. 혈중 알코올 농도 상승으로 라벨 속 아이와 이불속 아이와 겹쳐 보이면 인생에 그 어떤 태풍이 다가오더라도 기필코 견뎌내겠다는 의지가 용솟음친다. 아빠는 남자보다 강하다!
■ 무덥고 습하고 짜증 나는 날
클라우디 베이 소비뇽 블랑 (가격 4만원 대)
대한민국에서 한여름에 카뮈 <이방인>를 읽는 건 주인공 '뫼르소'의 분노와 돌발행동에 공감할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옆 사람과 살짝 스치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어오르는 후덥지근한 때에는 그저 시원한 화이트 와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재력이 받쳐준다면 프랑스 부르고뉴 '뫼르소' 지역의 고급 샤르도네 와인을 마시면 좋겠지만 현실은 마트에서 가성비 좋은 녀석을 찾아 헤맬 뿐이다.
마트 와인이라면 역시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 품종이 훌륭한 선택지겠지. 그중에서도 나름 명품인 클라우디 베이의 청량함과 시원함은 한 모금만 영접해도 뿅망치를 피하는 두더지처럼 땀이 다시 땀구멍으로 숨어들 정도다. 더위를 안주 삼아 벌컥벌컥 마셔도 좋고, 출출하다면 차가운 샐러드나 포케와 같이 마셔도 그만이다.
■ 도파민 뿜뿜 화창한 날
샤또 데스클랑 위스퍼링 엔젤 로제 (가격 2만 원대)
돗자리 챙겨 동네 공원 잔디밭에 깔고 그 위에 누워 푸르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보고 싶은 날씨에는 누가 뭐라 해도 로제 와인이 떠오른다. 잔디 살랑이는 미풍이라도 불어주면, 구강 내에도 산들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욕구가 슬며시 고개를 든다. 샤또 데스클랑 위스퍼링 엔젤 로제를 칠링백에 넣어서 가져왔다면 만사 해결.
함께 챙겨온 휴대용 와인잔에 따르니 특유의 투명한 연분홍색이 넘실거린다. 꽃, 딸기, 복숭아를 연상시키는 잔망스러운 향에 풋과일이 연상되는 산뜻한 산미와 은은한 단맛이 수면 전에 듣는 ASMR처럼 감각 세포들을 간드러지게 자극한다. 왜 이 와인의 이름이 '위스퍼링 엔젤(Whispering Angel)'인지 알겠구나. 그렇게 천사의 속삭임에 녹아들다가 대략 7분 후 꿀잠에 빠져든다.
■ 춥고 서러운 날
토마시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 클라시코 (가격 6만 원대)
지금같은 폭염에 더 간절해지는 추운 날씨에는 어떨까. 춥다고 꼭 서러운 건 아니다. 하지만 마음마저 나란히 추운 날에는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되돌아보면 서러운 감정이란 외적인 요인보다는 내면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더라. 그럴 때는 허물없는 친구를 만나 허심탄회한 일침을 들어도 좋을 것이다. 토마시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 클라시코를 지참하고서 말이다.
건포도로 만든 와인 특유의 농밀함은 막역한 친구의 솔직한 조언과 더불어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으로 날아온다. 기왕이면 뜨끈한 불판에 한껏 달궈진 고기와 곁들여 먹어보자. 마음이 한결 누근해져 공 받을 준비가 끝난 포수 미트처럼 친구의 조언도 아마로네의 풍미도 온전히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아참! 친구야. 와인은 내가 가져왔으니 고기는 네가 쏘는 걸로? 안 그러면 서러울 것 같아.
■ 흐리고 우울한 날
조셉 페블레 부르고뉴 피노 누아 (가격 4만 원대)
원래 우울했는데 때마침 날씨가 흐린 것인지, 하필이면 날씨가 꿀꿀해 기분이 내려앉은 건지 모르겠다만 어차피 이렇게 된 참에 선후관계가 뭐 그리도 중요하겠나. 어휴. 한숨이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다. 이럴 때면 긴급하게 피노 누아 수혈이 필요한 시간이다. 우울한 감정은 그 우울함에 집중할수록 더욱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니, 일단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감각 자극에 집중해 보자.
피노 누아 와인을 잔에 따르고 전등 밑에서 그 영롱한 루비 레드를 2분 이상 여러 각도로 바라본다. 마시는 액체의 색깔이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난 정말 몰랐구나. 코에 가져가니 체리, 딸기 향에 약간의 허브 뉘앙스가 깔려있고 입에서는 흙 내음 가득한 산미와 부드러운 타닌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여운을 이어간다. 조용한 사찰에서 감칠맛 가득한 선식을 영접하는 듯한 이 단아함이라니. 음식의 맛 자체가 인간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나긋한 음악을 틀어놓으면 그 효과는 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