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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 용암서원 앞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 흉상
 합천 용암서원 앞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 흉상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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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 전부터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 선생을 무척 경외(敬畏)해왔다.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경외의 인물인 까닭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남명(南冥)이란 호이다. 남녘 남(南), 어두울 명(冥), 풀이하면 "남쪽 어두운 곳"을 뜻한다.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 나온다. 하필 어두울 명자를 쓴 것은, 밝은 대낮의 하늘은 파랗지만 빛이 없는 밤 하늘은 컴컴하다. 옛날 사람들은 하늘은 검고(玄) 땅은 누르다(黃)했다. 남명은 빛이 비치지 않은 곳, 외지고 궁벽한 곳을 뜻한다.

둘째, "저 천석(千石)들이 종을 보라/크게 두드리지 아니하면 소리 나지 아니하지만/두류산과야 어찌 같으랴/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나니."와 같은, 생각과 국량의 크기이다. '남명'은 몸 길이가 몇 천리인지 모르는 봉새가 6개월 동안 날아서 당도한 곳의 명칭이다.

셋째, 불의한 현실에 출사를 거부하면서 분방한 삶은 살았다. 그는 벼슬을 통한 현실참여를 원초적으로 거부한 것이 아니라, 불의와 부패가 일상화된 시대에 출사를 하지 않고 처사로서 자신을 지키며 오연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운명할 때 제자들이 명정에 쓸 칭호를 묻자, 처사(處士)라 쓸 것을 당부했다. 처사란 벼슬하지 않고 재야에 있는 선비를 일컫는다. 그는 참 선비의 처신을 보여주었다.

넷째, 자신을 수양하는 데 마음을 경(敬)에 두고, 실천의 준거를 의(義)로 삼았다. '경의'는 그의 생애의 가치관이었다. 항상 '거경행의(居敬行義)'를 내세우고 실행하였다. 평생 허리에 찬 칼에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를 새겼다.

다섯째, 문정왕후의 국정농단과 명종의 무능에 대해 올린 <단성소(丹城疏)>에서 "전하의 국사가 그릇되기는 오래이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들의 뜻은 이미 전하에게서 멀어졌다. 비유컨대 큰 나무가 백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한테 파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가. 문정왕후는 속이 깊지만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명종은 유충(幼沖)하여 단지 선왕의 일개 고단한 후계일 뿐이니, 천재의 빈발과 인심의 여러 갈래를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격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섯째, "물이 배를 띄울 수도 있고 엎을 수도 있는 것처럼, 백성은 왕을 추대하기도 하고 정권을 뒤엎기도 한다. 물은 백성이요, 배는 임금이다. 물은 평탕할 때도 있고 격탕할 때도 있다. 또 배는 순항일 때도 있고, 역행일 때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배는 물 위에서의 배이지, 물이 배의 물일 수 없다. 그러므로 배는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민암부(民巖賦)>를 지어 임금과 조정대신들에게 거침없이 보낸 용기와 선비도의 모습이다.

일곱째, '기세도명(欺世盜名)' -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훔치는 관리와 유생들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다. "요즘은 공부했다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정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진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하고 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 상처를 입게 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니 아마도 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와 같은 사람은 마음을 보존한 것이 황폐하여 배우려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지만 선생 같은 분은 몸소 상등의 경지에 도달하여 우러러보는 사람이 참으로 많으니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 - 사회지도층 명사들에게 기세도명하는 자들을 질책하라는 주문이다.

여덟째, "사십 년 동안 더럽혀져 온 몸 / 천 섬 되는 맑은 물에 싹 씻고 /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 지금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쳐 보내리라." 라는 시에서 보이듯이, 그는 출세와 영달을 꾀하지 않고 추상열일의 품격을 가지고 있는 참 선비였다. 조선시대 선비상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아홉째, 젊은 시절에 자신의 정신력과 체력을 기르고자 두 손에 물그릇을 머리에 바쳐들고 밤을 세웠다는 각고면려의 노력형이다. 항상 깨어 있음을 상징하는 성성자(惺惺子)라는 쇠방울을 차고 다니고 속세에 오염되지 않으려는, 부단히 자신과 싸운 분투자이다.

열번째, 왜구의 침략을 내다보면서 이에 대한 경계를 설파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의 사후 20년 만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싸운 사람은 남명의 제자들이다. 곽재우·정인홍·전치원·성여신·이대기·하락 등 57인이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유독 남명의 문하에서 가장 많은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경과 의로 상징되는 스승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열한번째, 학구의 범위가 대단히 넓었다. 당시 성리학으로 무장한 유생들은 불교는 물론 노장학(老莊學)까지 이단으로 치부하면서 적대시하였다. 그는 불학의 고원한 이치를 통달하는 것은 유가와 불교가 다르지 않다고 인식하고, 선종(禪宗)의 개념을 적지 않게 받아들였다.

열두번째, 수많은 학인 제자들을 배출하고, 이들이 조정에 벼슬하여 당시의 조선사회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만규가 <조선교육사>에서 우리나라 교육자 중에 가장 성공한 분으로 남명을 지목할 만큼 위대한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후에 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표현대로 남명의 인품이나 사상은 '의(義)' 자로 표현될 만큼 의롭게 살았다. 다시 불의가 지배하고,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국민을 속이려는 자들이 활개치는 '기세도명'의 시대에 의인선비의 삶과 정신을 일깨웠으면 한다.

덧붙혀, 오늘의 '지성인'에 속하는 선비란 학문·인격·경륜을 두루 갖춘 사람을 일컫는다. 사이비 지식인들이 설치는 세태에서 '진짜 선비'의 모습을 찾는 이유다.

이런 분이 남명 선생이었다. 어찌 경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연구가 덜 되고 학식이 부족한 처지에서 백세지사(百世之師)의 평을 받는 선생의 평전을 시작하려니 두려움이 앞선다.

뱁새가 봉새의 뜻을 어찌 헤아리랴만, 그래도 시도해 보련다.

읽은 이들의 따뜻한 질책을 기대하면서.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조식평전#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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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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