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리 뛰어난 도입을 가졌다 했다. 그런 평을 듣는 작품이 제법 있지만(이를테면 <안나 카레리나> <모비딕> <자기 앞의 생> <칼의 노래>와 같이 첫 문장이 유명한 작품들), 솔직히 그리 대단하게 여긴 적은 없었다. 유명세가 평범한 문장조차 유명하게 하였겠거니, 그저 그렇게 여겼던 것이다.
<이방인> <위대한 개츠비> <어린왕자>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읽는 이의 주의를 붙들어 놓는다거나 <스토너>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그렇듯, 읽고 나서 다시 펴게 만드는 첫 문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뿐이 아닌가. 쌓아올린 무엇을 재료로 획기적 전환과 진한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문장은 엄청날 수 있겠다. 그러나 가진 무엇도 없이 배경설명을 해야 하는 첫 문장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나는 그렇게만 여겼다.
<설국>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첫 세 문장은 다음과 같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일본문학 정수라던 세 문장, 과연 그렇다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명문이었다. 그것도 대단한. 첫 문장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있고, 주인공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꽤나 노력을 들여 옮겨왔음을 알린다. 처음이 수평이었다면 다음은 수직이다. 밑바닥부터, 그것도 밤의 밑바닥부터 제 색을 알린다.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서부영화처럼 아래부터 위로 훑어간다. 밤의 밑바닥은 하얗다. 밤이니 그 위는 어둡다. 아마도 밤하늘일 것이다. 하얗고 검은 것의 대비가 절묘한 감상을 일으킨다. 세 번째 문장.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서고 이야기는 본격 막을 올린다. 배경은 그곳에 있고, 주인공이 옮겨왔다.
이보다 완전한 세 문장이 있을까 싶다. 배경과 분위기를 문학적 묘사 가운데서 끝마친다. 덜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완전한 균형. 이를 가리켜 일본문학의 정수라 한 말이 틀리지가 않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며 아시아 전역에 전란의 기운이 흩뿌려진 1937년이다. 불과 4년 뒤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추축국과 연합국 사이의 2차대전 구도가 선명해진다. 한반도를 비롯해 만주와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아시아 곳곳에서 심각한 수탈이 벌어진다. 적어도 아시아에서 지난 한 세기 가장 많은 비명이 터져나온 10년을 1937년부터라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테다.
<설국>이 발표된 해가 바로 이때다. 1937년, 30대 후반이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썼다. 유럽에서 유행하고 일본에서도 잠시 뿌리내렸던 자연주의 문학, 또 1920년대부터 크게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풍토에 반대하며 소위 신감각파의 대표격으로 활동한 그다. 과학과 이성, 사상과 정치적인 문제를 문학으로부터 떼어내고 문장과 분위기가 이루는 감각이며 미학적 아름다움에 집중한 사조라 평가된다. 오늘날 탐미주의라 부르는 갈래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가와바타의 문학은 그 특유의 유려한 문장과 맞물려 일본스런 아름다움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다 봐도 좋겠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노벨문학상 안긴 명작
<설국>은 가와바타의 대표작이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당시 대표작으로 언급된 것이 바로 이 짧은 소설이었다. 등단 후 12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기간 문학을 수련한 결정이 이 작품에 담겼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첫 세 문장은 당대 세계 문학계의 주요 독자층을 사로잡았다. 물론, 문화를 건너 수상한 문학작품이 대개 그러하듯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오죽하면 가와바타가 거액의 상금 절반을 떼어 사이덴-스티커에게 주었을까.
오늘날 <설국>을 읽고 높은 평가를 하는 독자는 그리 많지만은 않다. 이 책을 두고 가진 여러 모임에서 책을 좋다 평가한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열댓 명의 독자 가운데 단 두 명만이 호평을 내놓았다. 나머지가 한 말은 대체로 이러하다. 지루하다는 평이 가장 많았고, 잘 읽히지 않는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별로 중요한 내용이 없다, 흐지부지 끝난다, 대략 이런 평가들이다. 틀리지 않은 이야기다. <설국>은 서사보단 분위기, 주제의식보다는 감상에 집중한다. 서사와 주제의식이 소설, 나아가 문학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선 <설국>의 가치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설국>은 무용비평을 업으로 삼고 있는 시마무라가 북방의 니가타현을 찾아 머물고 떠났다 다시 찾아오는 이야기다. 줄거리랄 것은 얼마 없고 시마무라가 보고 듣고 겪은 일을 담고 있을 뿐이다. 아내를 대동하지 않은 채 홀로 이곳을 찾은 시마무라는 마을의 게이샤 고마코를 찾고, 그녀에게 은근한 색정을 느끼면서도 그를 드러내지 않은 채 다른 여자를 구해오라 말한다. 그로부터 여러 날이 지나 이번엔 고마코의 지인이자 여관에서 일하는 요코에게 마음을 품는다. 대놓고 드러나는 갈등은 없으나 감정은 일어나고, 감정은 일어나지만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로부터 묘사와 문장 그 자체의 형식이 갖는 미학이 도리어 두드러진다는 평가가 있으나 동의하는 이는 동의하고, 않는 이는 않는 것이다.
이야기와 주제의식 없는 소설이 무용하다 여기는 나다. 그럼에도 앞에 적은 첫 세 문장이 훌륭하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문장으로 그보다 많은 정보를 담을 수도, 필요도 없다고 여긴다. 그 정보의 절반쯤이 문학적 감상을 일으키고 있단 점은 더욱 훌륭하다. 소설 전체의 분위기와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모두 읽고 난 뒤 다시 돌아보면 그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문장은 어디까지나 세 문장일 뿐이다. 걸출한 세 문장 뒤 못한 세 문장이 나오면 결국은 그 합이 소설을 이룬다 해야 옳다. 나는 이 세 문장 뒤 그와 견줄 만한 문장을 거의 찾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설국>을 어떻게 훌륭한 소설이라 할 수 있는가.
지난 시대의 명작과 오늘의 범작 사이
게이샤를 앞에 두고 그를 탐하려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며 다른 여자를 구해오라 요구하는 시마무라의 모습, 말하자면 소설의 초반부 에피소드가 제법 흥미로운 건 사실이다. 소설 가운데 드물게도 선명한 욕구가 일어나 제 목적을 이루려 애를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는 아니다. 시마무라는 무능하고, 다른 이들 또한 무력하거나 무관심하기만 하다. 욕구, 또는 욕망은 소설 작법에서 캐릭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인데, 왜 그리 강조되는지를 이와 같은 반례가 알도록 한다. 그렇다면 욕구가 선명하지 않은 후반부 이야기에도 이 작품은 어떻게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큼 고평가를 받았는가.
1960년대는 미국이 세계의 중심국가로 확고히 발돋움한 시기다. 1970년 오일쇼크가 있기 전까지 전례 없는 경제 호황을 누렸다. 1960년 미국과 신안보조약을 체결한 뒤 전폭적인 경제적 지원을 받은 일본 또한 급격한 발전을 이뤘다. 세계 속에서 일본의 지위가 전과 달리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고조되는 냉전 가운데 아시아 자유주의 진영의 대표국가로 존재감을 넓혀갔다. 훗날 '오리엔탈리즘'으로 명명되는 동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의 하나로써 일본에 대한 인상이 널리 퍼져나갔다.
<설국> 속 여러 요소가 서구인에게 일본스러운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했단 평가엔 일리가 있다. 이를테면 눈 쌓인 휴양지와 따뜻한 온천, 매춘과 가난이 타락과 연결되지 않는 순수한 세계, 음악과 예술, 정갈한 음식과 희생이 깃든 마음 같은 것이 소설 가운데 유려한 문장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서양 소설이었다면 비효율적이고 지루하단 소리를 들을 것이 아름답고 유려하단 평가를 받는 건 여러모로 이색적이다. '일본어가 가진 불명료함'이란 표현을 도리어 칭찬으로 활용한 사이덴-스티커의 해설은 이 같은 판단의 단서가 된다.
오늘날 <설국>을 읽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시아 작가 가운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리 많지 않은 사례 중 하나로, 또 그와 같은 이유로 대문호로 알려진 가와바타를 이해하기 위해, 나아가 노벨문학상의 지난 경향성을 살피는 정도는 물론 의미가 일일 테다. 그러나 나는 그 너머, 진정으로 훌륭한 도입이란 어떤 것인가를, 또 위대한 첫 문장이라 해도 소설 전체를 건져올릴 수 없단 걸 보여주는 사례로써 이 책을 내보인다.
언제나 시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나아감과 지속함, 그리고 잘 끝내는 일이 그보다 중할 수가 있겠다. 소설 속 피어났으나 나아가지 못했던 마음들이 보여주듯이. 그러니 우리는 일단 쓰고, 또 살아내야 한다. 처음이 못하다 해도 기죽을 필요는 없다. 다음이 그보다 나으면 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