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만큼 사람의 삶을 잘 보여주는 일이 드물다. 그 업의 많은 부분을 직업이 차지한다. 밥벌이의 수고로움과 지겨움, 때로는 자아실현의 즐거움과 좌절 사이를 인간은 직업을 통하여 겪어낸다.
기자는 흔한 업이 됐다. 좁은 문이라는 언론고시는 옛말이다. 상위 너덧개 매체 좁은 문을 제하면, 잡다한 매체 1만이 넘는 기자가 좁은 땅에서 부대끼며 살아간다. 콘텐츠의 범람 속 언론만이 뉴스를 생산하지도 않는다. 갈수록 낮아지는 언론과 비언론의 문턱에서 언론인만이 가진 특징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기자란 특별한 업이다. 세상 모두가 제 일에 매진하는 세상이 아닌가. 제 일이 아닌 걸 전하는 게 제 일이 되는 일이라니 얼마나 독특한가. 어느 매체, 어느 부서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겠으나 독자며 시청자를 상대로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을 전한단 건 기자의 중심된 업이라 할 수 있겠다.
책 소개하는 기자의 읽고 쓰는 삶
<쓰는 직업>은 20년 차 문화부 기자 곽아람의 에세이다. <조선일보> 문화부, 것도 책 담당 기자로만 20년을 근속하며 여러 권의 책을 쓴 기자 출신 저자다. 펜기자, 또 첫손 꼽는 보수매체 기자로서 제 업의 면면을 직접 소개하니, 문화부 신문기자의 업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는 독자에겐 색다른 기회가 되어준다. 글 쓰는 이라면 한 번쯤 선망했을 기자란 직업, 그중에서도 책을 다루는 기자의 관심과 고충이 무언지 읽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신문기자는 쓰는 일을 애정하는 이들이 고려하는 주된 직업 가운데 하나다. 꼭 같은 이유로 수많은 작가들이 기자를 제 커리어의 시작점으로 삼기도 했다. 마크 트웨인과 헤밍웨이 같은 해외 유명 작가는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기형도와 김훈, 장강명 등이 기자 출신이란 게 잘 알려져 있다. 필자 또한 6년가량 기자로 일하며 소위 '문청' 기자를 적잖이 만나보았다. 글로써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직업이 그리 많지 않은 현실 가운데, 글과 삶, 기사와 문장을 고민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이 또한 많으리란 생각에 이를 때가 잦았다.
흔히 2, 3년마다 부서를 옮기는 게 종합지의 기자다. 그러나 소수의 기자는 제 자리를 오래 지키는 행운을 맞이하기도 한다. 개인의 요구나 조직의 필요에 따라, 또 전문적인 역량을 가진 기자를 길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한 기자가 특정 영역에 오래 머물게 된다. 곽아람이 꼭 그런 경우다. 수습을 포함한 초년병 시절 사회부 사건팀 기자로 근무한 걸 제외하면, 커리어 대부분의 기간을 문화부, 책을 소개하는 기자로 지냈다.
책엔 수습부터 여성 최초로 문화부 서적 담당 팀장이 된 오늘에 이르는 이야기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소개돼 있다. 기자 생활 20년 동안 8권의 책을 펴낼 만큼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기까지의 마음가짐 또한 설명한다. 낮엔 기사를, 밤엔 책 원고를 쓰는 작업은 고단할 밖에 없는 일이다. 기사와 저술에 쓰이는 미묘한 문장의 차이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신문기자는 어떤 고민을 할까?
지면매체가 가진 분량의 제약과 다양한 지적 배경을 가진 독자들이 두루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목적을 위하여 신문기자는 단문을 요구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한글 문장이 가진 호흡과 리듬, 다채로운 맛과 멋을 고려하면 장문이 단문보다 못하단 건 지극히 비좁은 오해에 불과하다. 이문열과 박완서 같은 문장가 또한 이 같은 편견과 맞서 장문을 적절히 활용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일선에서 글을 쓰는 기자들 사이에선 기사를 위한 글쓰기가 정답인 양 여기는 세태가 팽배하다. 저만의 호흡을 가진 문장을 단련하는 이를 찾기란 정말이지 어렵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글쓰기를 고민하는 선배가 저자를 앞에 두고 기사 글쓰기에 안주하지 말라 권하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다가든다. 기사 글쓰기가 문장을 망친다며 저만의 문장을 단련하길 독려하는 목소리가 얼마나 귀한지. 그로부터 낮의 쓰기와 밤의 쓰기의 차이를 고민하며 집필을 멈추지 않은 저자의 성실함이 여덟 권의 책 출간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기자라는 일이 제게 맞지 않음을 토로하는 순간들도 독자들에게 색다른 감흥을 일으킬 수 있겠다. 기민하게 보도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찾아내는 동료들과 저를 비교하는 순간들, 심지어는 데스크가 기삿거리가 못 된다며 '킬!' 하는 상황을 반갑게 여기기까지 하는, 정치며 이념 같은 거대한 것들에게 피로감을 느꼈다는, 심지어는 어느 사건으로 경찰서를 찾았다가 억울함에 엉엉 목을 놓아 울어버렸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은 다른 기자들이 잔뜩 힘주어 써낸 책들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대체 이런 사람이 어떻게 기자를 했는가 당혹하게 될 무렵, 책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다름 아닌 책 이야기다. <조선일보>가 책을 소개하는 북스 코너는 출판계에선 제법 무게감 있는 코너로 통한다. 다름 아닌 독자층 때문이다. 다른 매체에 비해 월등히 나이든 세대가 많이 보는 보수신문의 특성 때문일까. 오늘날 한국 출판가의 주된 독자층이라 불리는 두 축, 즉 장년 이상 세대와 2030 여성 가운데 전자를 이 코너가 굳건히 붙들고 있는 것이다. 관심은 곧 부담이 되기도 한다. 지면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독자들이 기사 문구 하나하나를 따지며 전화를 걸어온 이야기가 책 가운데 에피소드로 자리한다.
저자는 매주 출판사로부터 들어오는 신간과 그 가운데서 소개할 만한 책을 선별하는 과정, 노벨문학상 수상작 보도 같은 연례행사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등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또 해외출장에서 유력 작가며 배우를 만나 인터뷰한 이야기 등 제 기자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사건 또한 두루 적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문화부 기자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고, 제가 읽는 기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공정함과 정의를 고심한다 말하는 용기
책에 따르면 곽아람은 고심하는 기자다. 그녀의 기사를 훑는 것만으론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고민들이 기사 아래 깔려 있다. 제 취향을 넘어 좋은 책을 선정해 소개하기 위한 고민, 짧은 글줄 안에 들어찬 문장과 구성에 대한 고심, 심지어는 공정함과 정의에 대한 것이다. 속한 매체가 받는 흔한 비판들로부터 한 발 떨어져 있는 부서에서 느끼는 감상들도 흥미롭다. 그것이 그대로 이 책의 자산이 된다. 그에 대한 평가는 물론 독자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타 부서에 비해 취재랄 것이 얼마 없고 업무부담 또한 상당히 적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저만의 고충이랄 것이 제법 된다. 당연한 소리지만 책을 소개하기 위해선 책을 읽어야 하고, 완벽주의 탓에 일부를 발췌독하지 못하고 고지식하게 전체를 읽는다는 이야기가 오래 서평가로 지내온 내게도 남다르게 들려온다.
지난 십수 년간 '북스' 코너를 읽어본 날이 제법 있었다. 출판사의 홍보글을 그대로 옮겨적는 수많은 매체 책 소개기사 사이에서 그래도 조금은 저만의 색깔이 있는 소개를 해나가는 매체라고 여겼던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사이에서 곽아람의 기사를 좋게 본 날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는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두 이 책이 이룬 공이다.
'취재를 할 때마다 자문한다. 이 일은 옳은가? 기사를 쓸 때마다 생각한다. 이 글은 공정한가? 나 자신이나 회사의 이익보다 공익을, 옳고 그름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직업을 가진 것에 때로 감사하다. 사회생활의 첫발을 언론사에서 뗀 가장 큰 혜택은 선공후사라는 가치관 아래 좀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는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략) 베스트셀러가 된 마이클 샌델의 책 제목처럼 기자들은 매일 묻고 또 묻는다. 정의란 무엇인가. 과연 무엇이 정의인가.' -17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