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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신경 써 차려입은 윗옷이 금세 땀에 젖어 축축해졌다. 28일 찾은 대전 봉산동 갑천 인조 잔디야구장 조성 공사장은 예상보다 넓었다.
대전시가 밝힌 야구장 조성 면적은 9110㎡(약 2760평)이다. 하지만 기자가 둘러본 공사가 진행 중인 면적은 눈대중만으로도 2배 이상 컸다.
주민들의 반발을 의식한 듯 현장 공사는 잠시 멈춰 있었다. 하지만 이미 수천여 평 면적을 평평하게 다듬고 그 위에 두껍게 흙과 파쇄석을 깔아놨다. 인조 잔디를 입힐 기초공사가 거의 마무리된 것이다.
갑천 하류 둔치인 이곳은 공사 전에는 대부분 풀이 자라는 자연 초지였다. 일부에 흙바닥 농구장이 조성돼 있었다.
대전시가 이곳에 주민들도 모르게 인조 잔디 야구장 조성 공사를 시작한 건 지난 7월이다. 대전시는 관할 주민자치센터도, 주민자치위원회도 최근 우연히 공사 내용을 알 만큼 일방적으로 일을 벌였다.
공사장 앞 갑천을 천천히 둘러봤다. 며칠 전 내린 소나기에 폭 140m의 강폭을 꽉 채워 물이 흐르고 있었다.
"홍수 때 농구 골대까지 물에 잠기는 곳"
그런데 공사장 바로 아래 천 바닥에 낯익은 철 구조물이 반쯤 물에 잠긴 채 거꾸로 박혀 있다. 마침, 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었다.
이 주민은 "올해 농구장과 바로 옆 축구장이 물에 잠겼는데 그때 떠내려간 것"이라며 "비가 많이 안 와도 대청댐에서 방류를 많이 하면 농구 골대까지 물에 잠긴다"고 말했다. 그는 공사 중인 인조 잔디 야구장을 가리키며 "지난 7월 초 수해 때도 침수됐던 곳"이라고 귀띔했다.
대전시가 지난해와 올해 홍수 때 철 구조물이 쓸려 나갈 만큼 피해를 본 것을 알면서도 이곳에 인조 잔디 야구장 조성 공사를 벌였다는 얘기다.
이곳이 상습 침수지역이고 홍수 때마다 복구가 어려울 만큼 큰 피해가 발생하는 곳임을 알려주는 사례는 또 있다. 바로 인조 잔디 야구장 공사장에서 갑천을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갑천 야구공원(대덕구 문평동)이다. 직선으로 불과 150m 남짓 거리다.
대전시가 2017년 조성한 야구공원은 갑천변을 따라 약 1km 구간에 8면의 야구장을 갖췄다. 공사장을 등지고 맞은편을 건너다 보자, 야구 공원 내 큰 시설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야구 경기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기장이 있어야 할 곳에 잡풀이 빼곡히 덮여 있다.
강을 건너 갑천야구공원으로 향했다. 천변은 7월 홍수 때 입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난간 철 구조물이 폭격을 입은 듯 휘어져 누워있다. 나머지는 쓸려 사라졌다. 야구 경기장이 있던 곳으로 들어서자, 잡풀이 허리까지 덮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짓단에 풀씨가 덕지덕지 붙었다.
풀숲을 헤치고 한참을 걸었지만, 야구장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 잡풀에 덮였거나 잡풀이 없는 곳은 바닥이 움푹 패여 물웅덩이로 변했다.
곳곳에 키 높이로 자란 쑥대도 보였다. 말 그대로 '쑥대밭'. 홈베이스로 보이는 낡은 시설물과 풀숲 곳곳에 박혀 있는 깃발이 이곳이 야구장이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빠른 걸음으로 1km 구간을 둘러봤지만, 온전한 곳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야구장 8면 전체가 폐허가 된 것이다. 그나마 곳곳에 고라니 발자국과 배설물이 보였다. 홍수 피해로 사람들이 차지하던 땅이 야생동물에게 되돌아간 셈이다.
주변을 지나는 한 주민은 "지난해 여름 홍수 때 큰 피해를 당했는데 복구도 하기 전 올해 또다시 피해를 입어 (복구를) 포기한 것 같다"라며 "피해가 반복되는데 복구하는 게 이상하지 않겠냐"고 답했다. 그는 "애초 (침수가 잦은 이곳에) 야구 공원을 만든 게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했다.
기자가 해당 주민에게 맞은편 천변을 가리키며 '붉은색 띠를 두른 저곳에 대전시가 인조 잔디 야구장 공사를 하고 있다'고 말하자 "설마 바로 눈앞에 수해로 엉망이 된 야구장을 보고서 또 야구장을 만들리 있겠냐"라며 "잘못 알고 계신 것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현장을 둘러보며 대전시가 '침수 피해가 예상되는 곳에 왜 인조 잔디 야구장을 건립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더 커졌다.
앞서 대전시 관계자는 지난 23일 기자의 질문에 "여건이 좋지 않지만, 다른 지자체에서도 천변에 조성하는 곳이 있고 홍수에도 쓸려가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려 한다"고 답변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면서도 "(늦었지만) 현장을 다시 둘러 보고 주민들과 협의 후 불가피한 경우 공사 중단도 감안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실제 대전시 관계자는 지난 26일 현장을 다시 둘러 보고 지역 주민들과 뒤늦게 첫 논의를 벌였다. 하지만 이날 대전시의 답변은 '윗분들께 보고하고, 세밀히 검토하겠다'는 의례적인 선에 그쳤다.
대전시 '윗분'들은 왜 폐허가 된 야구 공원을 눈앞에서 보고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일까. 대전시 '윗분'들은 '두 번 실수하지 말라'며 백지화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목소리에 왜 시간을 끄는 걸까.
대전시 윗분들에게는 두 번 실수도, 세 번 실수도 다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 일상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는 의미)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