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방조제를 지나 화원반도에 들어섰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밭이다. 해남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 곱게 가르마를 가르고 동백기름 반지르르 바르듯, 두둑을 만들고 비닐을 씌웠다.
고구마만 유명한 줄 알았더니, 고구마 못지않게 명성 높은 김장배추 갈이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이 오리 궁둥이를 하고 배추 모종을 심는다. 스프링클러가 힘차게 돌며 물을 뿌린다.
9월 3일, 땅끝마을 가는 길. 가로수엔 청춘을 불태우고 중년에 들어서며 한올 두올 흰 머리카락 나오듯, 듬성듬성 노오란 잎이 섞여 있었다.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가 이번 주 말이다. 여전히 햇살은 바늘 끝 같고 스치는 공기는 뜨겁지만, 가을은 이미 코밑까지 와 있었다. 가을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땅끝전망대, 걸어 올라간 이유
땅끝전망대는 갈두산 사자봉 정상에서 우뚝했다. 모노레일을 타면 편하겠지만, 공기까지 맛있다는 해남이라기에 걸어 올랐다. 타오르는 횃불을 형상화한 동방의 등불이란다. 9층 전망대에서 발아래로 서해와 남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앞서고 뒤서는 섬들이 연못에 솟아난 바위들 같다.
목젖이 따끔거릴 정도로 톡 쏘는 콜라 같은 풍경이다. 맑은 날은 제주도가 아슴푸레 보인다는데, 날씨 탓인지 느낌은 오지 않았다.
도서 지역을 제외한 우리나라 내륙 최남단에 있다는 땅끝탑이다. 전망대에서 바다로 계단이 구불구불 한없이 이어진다. 중간중간 함경도에서 전라도까지 표시된 지도가 나타난다. 어디만큼 왔나 짐작하라는 듯이. 내려가는 것도 지친다. 올라 올 때 세어 보았다. 구백몇 개까지 세다가 걷는 것도 힘들어 포기했다. 전망대에 오르지 않고 바로 갈 수 있는 데크 공사가 한창이었다. 나중에 올 걸.
땅끝탑이 있는 곳이 서해와 남해의 경계점이다. 해안 도보 여행길인 남파랑길 마지막인 90구간이 끝나고, 서해랑길 1구간이 시작된다. 경계점 기준을 두고 앞서 내려갔던 분들이 이것이 옳다 그르다 제법 심각했다. 동‧남‧서해 경계 구분은 관련 부서의 입장에 따라 다를 터이니, 미인의 기준 정하듯 내 생각을 따르면 될 일을 놓고, 그 열정이 날씨만큼 뜨거웠다.
갈두항 맴섬 사이로 보길도를 오가는 배가 수시로 드나들었다. 해남 사람이었던 윤선도가 살았다던 완도 땅 보길도로. 하마터면 배에 오를 뻔했다. 380여 년 전, 윤선도는 이곳이 아닌 이진항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갈두항에서 나와 우측 해안길을 따라 차량으로 30여 분, 완도대교 건너기 전 우측 마을이 이진항이 있었던 이진리다.
이진항에서 삼남대로가 시작되었다. 9대로(大路) 중 일곱 번째로 제주도 관덕정에서 서울 숭례문에 이르는 큰길이다. 제주 조천관 나루에서 배를 타고 이진항으로 와서 육로를 이용했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은 장흥 회령포에서 배설이 감춘 배 12척을 수습하여 명량으로 가던 중 머물며 해상훈련을 했다. 지금은 고깃배만 드나드는 한적한 포구가 되었다.
완도대교로 가는 큰길을 사이에 두고 이진리와 남창리가 마주 본다. 이진리는 이진성의 흔적이 일부 남아 마을을 감쌌고, 남창에는 해월루와 달량진성벽 일부가 남았다. 달량진은 1483년, 1552년, 1555년 왜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를 계기로 수군진을 달량진에서 이진진으로 옮겼다.
해월루는 조선 시대에 제주로 출장 가는 관원이 뱃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머무르는 곳이었다. 물이 들어차면 바다에 달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지금 건물은 2011년 민박용 기와집으로 복원된 것이다.
삼남대로를 따라 해남읍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13번 국도다. 두 산 사이를 지난다. 좌측은 달마산, 우측은 두륜산이다. 달마산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며, 미황사를 품에 안았다. 두륜산에는 대흥사가 자리 잡았다.
절 내에 포충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공훈을 세웠던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과 처영의 영정을 봉안했다.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다. 조선 후기 불교계 충의를 기리기 위해 국왕이 편액을 내린 사당이 세 곳 있는데, 묘향산 보현사의 수충사와 밀양의 표충사와 이곳이다.
해남읍은 북쪽 금강산‧동쪽 덕음산‧서쪽 남각산이 감싸고 남쪽으로 음핵을 상징하는 말매봉이 솟은 자루 속같이 생긴 음혈의 형국이라 한다. 고산 윤선도 4대조가 덕음산 아래에 터를 잡았다. 삼남대로변으로 요즘으로 치면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인근에 자리한 교통의 요지다. 금호방조제를 막기 전에는 해남 깊숙한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니 한양까지 뱃길을 이용하기도 좋았을 터이다.
집 앞 커다란 은행나무가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고산의 4대조가 아들의 과거급제를 기원하며 심었다고 한다. 효종은 스승인 윤선도에 집을 하사했다. 경기도 수원에 있던 집을 해남으로 올 때, 옮겨 세웠다. 녹우당이라는 당호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푸른 비 내리는 듯하다, 며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친구 옥동 이서가 지었다.
지명에 대한 생각
땅끝마을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 말한, 우리나라 땅이 전라도 해남에서 함경도 은성까지다, 라는 기록에서 왔다고 한다. 땅끝이라는 말은 대륙을‧중국을‧서울을 기준으로 본다면 납득이 된다. 그렇더라도 '한반도의 시작 땅끝마을'이란 표현은 뭔가 개운하지 않았다.
16세기 말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포교하러 왔다. 황제에게 대서양 중심의 지도를 선물했더니 화를 내더란다.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중화(中華)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태평양을 중심으로 세계지도다. 그 뒤 아시아에서는 이 지도를 사용한다.
동원참치 김재철 회장은 집무실 벽면에 유라시아 대륙 지도를 거꾸로 걸어 놓았다 한다. 세계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한반도는 대륙 끝에 매달린 작은 반도가 아니라 태평양으로 향하는 천혜의 부두이자 동북아의 전략적 관문에 해당하는 요충지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둥근 지구에 위아래가 있을 수 없고, 시작과 끝도 매한가지다. 이러면 어떨까. '한반도의 시작 땅머리 마을'. 겨울에도 눈이 없다는 따스한 남쪽 고장이다. 겨울은 어디서든 문득 찾아 오지만, 봄은 남쪽에서 시작하여 차례로 오지 않던가.
여행을 기획한 최순희 화순군, 갈두항에서 만난 김효연 해남군 전남문화관광해설사님께 고마움 전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화순매일신문에도 실립니다.네이버 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에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