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 선생이 당세 또는 후세에 끼친 영향과 기여를 한 연구자는 세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선생은 기묘·을사 양대 사화로 인해 무너진 사기를 진작시켜 선비의 기상을 재정립하였다.
둘째, 선생은 끝까지 벼슬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정치를 외면하지 아니하고, 잘못된 정치와 관리의 타락과 횡포를 비판하며, 국가와 민생을 위해 건실한 방책을 건의함으로써 종래 재야 선비들이 취했던 염세적이고 회피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국가와 사회 속에서 해야 할 직분을 확인시켜 '벼슬아치보다 선비가 더 존중되는' 풍조를 불러일으켰다.
셋째, 천하의 영재들을 모아 '경의'의 학문을 가르친 결과로 임진왜란과 같은 국난을 당했을 때 무명 바지저고리의 선비들이 의연히 일어나 국난을 극복하는 데 실효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영향과 기여는 전후 연관해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를 다시 한마디로 줄인다면 '조선조 선비정신의 확립'이라 하겠다. (주석 1)
성호 이익은 16세기 후반기 시대의 종사(宗師)인 퇴계와 남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퇴계는 태백·소백산 아래에서 태어나 동방 유학의 종사가 되었으니, 그 도는 깊고 넓으면서 공손하고 겸양하여 문채의 빛남이 수사(洙泗)의 풍치가 있다.
남명은 두류(지리)산 아래에서 태어나 동방 기절(氣節)의 최고가 되었으니, 그 도는 높고 힘써 행하면서 의를 즐기고 삶을 가볍게 여겨 이익에도 굽히지 않고 손해에도 피하지 않아, 우뚝 선 절조가 있다. 이것이 영남 상·하도의 구별이다. (주석 2)
같은 시대의 인물 율곡 이이는 남명을 두고 "근래에 이른바 처사로서 끝까지 그 지절을 온전히 하고 벽립천인의 기상을 세운 분은 선생뿐이다."라고 하였고, 한강 정구는 "증자가 말한 '육척의 외로운 몸을 의탁할 만하고 백리의 땅을 다스리도록 맡길 수 있으며, 큰 절개에 임하여 뜻을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을 실천할 수 있는 분이 선생이니, 어찌 동방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호걸이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또 우암 송시열은 "사람마다 의(義)를 귀하게, 리(利)를 천하게 여길 줄 알고, 야에서 깨끗하게 사는 것을 숭상하고 관에서 탐욕함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알게 만든 것은 선생의 공로이다" 라고 하였다. (주석 3)
남명은 저서 <누항기(陋巷記)>에서 "천자는 천하로써 자신의 영토를 삼는 사람이지만, 안자는 만고로써 자신의 영토를 삼는 사람이므로 누항이 그의 봉토는 아니다. 천자는 만승(萬乘) 으로서 그의 지위를 삼는 사람이지만 안자는 도덕으로서 그의 지위를 삼는 사람이므로 곡굉(曲肱)이 그의 지위는 아니다. 그러니 그의 봉토는 얼마나 넓으며, 지위는 얼마나 크겠는가." 라고 한탄한다. 남명 자신도 이러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주석 4)
남명이 대왕대비를 궁궐 속의 한 과부, 군주를 고아라고 비판했을 때 사관은 실록에 이렇게 썼다.
당시 유일(遺逸)에 기탁하여 실제 학덕은 갖추지 않고 한갓 허명으로 이름을 도둑질하고 세상을 속이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조식은 몸을 바르게 지키고 깨끗함을 보존하며 초야에 묻혀 세상에 드러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초가 절로 향기를 풍기듯이, 그 명망이 조정에 전달되어 관직에 누차 제수되었으나 안빈자락하여 끝내 출사하지 않았으니, 그 뜻이 가상하도다. 그러나 조식은 세상을 결코 잊지 않았다. (주석 5)
남명은 '폭군방벌론'까지는 아니었지만, 조선의 전통적인 유학자들처럼 '군주 무오류'의 신봉자들과는 크게 달랐다. 이미 <민암론>에서 제기했듯이, 민의에 배치하는 군왕을 퇴치하는 것이 유학의 기본 정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국가원수에 관해서, 임금된 자는 성인은 못되더라도 현인은 되어야 하고, 정의를 지키고 또 설령 통솔 능력은 없더라도 적어도 측근 참견자들의 간섭이라도 물리치고 독립적으로 결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이만큼도 못한다면 별수 없이 백성이 왕을 축출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주석 6)
당시에 왕의 정치행사가 민중에게 근본을 두지 못하여 민심과 천의가 떠났다고 직접 왕에게 상소하는 것은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왕권과 왕위 자체를 비판한 죽음을 무릅쓴 직언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유교국가에서 민심이 떠나고 천의가 옮겨졌다면 혁명을 해도 가하고, 그 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유교정치사상에서 민심의 향배는 국가의 존망과 왕조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당시 민중이 어육이 된 현실을 직재하게 비판한 것은 유교정치사상의 핵심을 거론한 것이 된다. (주석 7)
돌이켜보면, 남명은 주자 성리학의 교조적 권위가 극성일 때의 인물이다. 여차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가문이 폐족되는 상황에서 거침없이 할 말을 하고 굽힘없이 살았다. 제자에게 준 칼의 자루에 새긴 오언절구는 곧 자화상이다.
불 속에서 하얀 칼날 뽑아내서
서리 같은 빛 달에까지 닿아 흐르네
견우 북두 떠 있는 넓디 넓은 하늘에
정신은 놀되 칼날은 놀지 않는다. (주석 8)
'칼 찬 유학자'라 하여 인정이 메마른 냉혈인으로 연상할지 모르지만, 지극히 따뜻하고 풍자에 능숙한 온혈인이었다. 상국 이양원이 어느날 산천재를 찾아 왔다. 허리에 칼을 찬 모습을 보고, "칼이 무겁지 않습니까." 의례적인 인사였을 것이다. 이에 "뭐가 무겁겠소. 내가 보기에는 상국의 허리에 매단 금대(金帶)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 (주석 9)
남명의 '경'과 '의'의 정신은 이후 백호 윤휴, 허균, 한말의 매천 황현, 면암 최익현, 단재 신채호로 승계되는 민족사의 정맥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주석
1> 김충열, 앞의 책, 100쪽.
2> 이익, <백두정간(白頭正幹)>, <새설(僿說)>, 권1, 천지간.
3> 이종목, <남명 조식의 삶과 문학>,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201쪽, 청계출판사, 2001.
4> 앞의 책, 93쪽.
5> <경종실록> 전 19.
6> 조추환, <남명의 정치사상>, <남명학 연구논총 제1집>, 268~269쪽.
7> <남명 조식선생>, 112쪽, 경상남도, 2001.
8> <국역 남명집>.
9> 한형조, <남명, 칼을 찬 유학자>, <남명조식>, 앞의 책, 1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