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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장면

졸업식이 끝나고, 내 유년은 졸업장 하나로 달랑 남았다. 자랑은 나의 것이 아니던 수업시간들,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낼 줄 모르던 선생들, 결코 친해질 수 없었던 교실들, 정들었으나 나의 무대가 아니었던 교정.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던 기약은 간데 없이 거칠 것 없던 내 유년은 시작과 같이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축하한다는 인사는 바라지도 않았다.

벌써 아이들은 부모의 손을 잡고 동생들 거느리고 비좁은 중국집을 북새통으로 만들고 있었다. 주문하는 소리 국수 기계 돌아가는 소리 전화통은 불이 나고, 늦게 도착한 아이들은 배운대로 얌전히 줄을 서 기다릴 줄도 알았다. 아이들은 누구나 자장면을 한 입 가득 베어물고 자랑스런 학교 생활을 추억했다.

부모들은 졸업장을 펴보고 우등상장을 펼쳐보이며 대견스러운 아들, 기특한 딸들의 등을 토닥거렸다. 국민학생의 때를 벗고 중학생이 된다는 것, 그것은 입안을 즐겁게 하는 쫄깃한 면발에 구수한 자장 냄새처럼 유쾌한 유희의 시작이었다.

유년의 언덕을 기어올라 마침내 다다른 미지의 세계, 가파른 언덕 매마른 나무가지에 달린 금단의 열매는 달고 매혹적인 빛깔로 아이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탁자 세 개의 좁아터진 식당, 단칸의 방안까지 꽉 들어찬 아이들, 상받는 아이들 박수나 쳐주다 달려온 나는 졸업장을 휴지처럼 구겨버렸다. 한 떼의 아이들이 밀려왔다 밀려가고 또 한 떼의 아이들이 밀어닥치고 나는 허기진 배를 쓸며 배달통에 자장면을 가득 담고 뛰었다.

저녁이 되자 졸업식을 마친 아이들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마을에서는 웃음소리 그치지 않았다. 졸업식이 나의 것이 아니었듯이 자장면도 나의 것이 아니었던 시간들. 하루가 저물고 식어버린 자장면처럼 나의 입술은 불어터졌으나 배달통을 움켜쥔 나의 밤은 끝을 몰랐다.

(2)시대를 살다

무엇이 부끄러운가
한 시대가 저물고
시대에 몸바친 청춘이 저물고
날도 저물어
이제
밤이 되면
서리 내리고 눈이 오리라
겨울 또한 깊어지리라
그러나 무엇이 부끄러운가
이룬 것 없이 사라져간 열망이여
얻은 것 없이 좌절된 꿈들이여
함부로 말하지 마라
함부로 말하는 자
두려워 마라
용서하지도 마라
한 시대가 저물고
시대에 몸바친 청춘도 저물어
밤 깊은데
그렇다고 무엇이 부끄러운가

(3)고향에서 비를 만나다

고향 가는 길이 멀다
고향 가는 길이 나는 늘 서툴다
막차를 잡아 탄 안도의 숨이 멈추기도 전에
막배를 놓칠까 안절부절 하였다
고향 가는 길
내 열정은 언제나 뜨내기와 같아
머무를 것을 두려워 하고
떠날 것을 불안해 하였다
고향에서 비를 만났다
고향에서마져 비를 만나 길을 잃었다
한순간도 평온을 얻지 못한 삶이여
타다만 장작처럼
재가되지 못한 열정이여
살아있는 동안은 평온을 얻을 수 없으리
편히 쉴 수 없으리
고향에서 비를 만났다
고향에서 비를 만나 길을 잃고 헤매었다

(4)십년 간

1991년 겨울
그때 나는 감옥에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연안부두 횟집 파출부 다니셨다
그때 동생도 감옥에 있었다
일당 이만원, 꼬깃꼬깃 모아온 돈을 어머니는
춘천교도소까지 찾아와 영치금으로 넣고
건빵과 고추장, 빠다, 삶은 계란을 사주고 가셨다
바쁜 걸음으로 되돌아가 어머니는
영등포 구치소의 동생에게도
영치금을 넣고 접견물을 넣었다
그때 정비사업소 경비원, 아버지는 실직했고
더이상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벌어오는 2만원으로 감옥의 나와 감옥의 동생과
실업자 아버지, 네 식구가 연명했다
동생이 풀려나고 나도 풀려나고 아버지도 다시 경비원이 됐다
동생이 결혼하고 몇 년 후 수도사가 되는 걸 포기한 나도
결혼했다
설날 아침 차례상 앞에 놓고 동생의 아들놈 낄낄거리고
식구들 모두 깔깔거리며 잠깐 웃었다
가뭇없는 시간이 흘렀다
어머니는 청각을 잃었다
아버지는 다시 실직했고, 동생은 이혼했다.
불행은 끝이 없고
행복은 계속 되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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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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