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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명동에 서일필이라고 했던가. 김기섭 전 안기부차장을 구속기소하고 강삼재 의원을 불구속 기소한 채, 안기부 예산 유용사건 수사는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국기문란 사건이라며 불퇴전의 결의를 보이던 검찰의 모습은 간데 없고, 정국정상화를 위한 정치적 고려에 따라 이 사건 수사는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장물취득자의 명단은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정작 도둑질을 지시한 사람, 즉 주범이 누구였는지는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예산을 유용해서 선거비용으로 사용하는 사건이 벌어졌어도 주범조차 밝혀내지 못한 채 사건을 덮어야 하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사를 거부하며 진상을 은폐한 야당을 탓해야 할지, 정치적 공세거리로만 써먹은 채 흐지부지 사건을 덮으려 하는 여당과 검찰의 태도를 탓해야 할지, 국민들로서는 납득되지 않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건 전모의 규명을 위해서는 강삼재 의원에 대한 수사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는 문제의 돈이 안기부 예산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그렇다면 돈의 출처가 무엇인지를 밝힐 책임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강삼재 의원은 검찰의 소환요구를 끝내 거부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를 지켜준 것은 방탄국회를 통한 불체포특권이었다.
현행 헌법 제44조 제1항은 국회의원은 현행범인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기중 국회의 동의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제2항에서는 국회의원이 회기전에 체포 또는 구금된 때에는 현행범인이 아닌 한 국회의 요구가 있으면 회기중 석방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가리켜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이라고 하는 것이다.
현정부 들어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으로 인해 정치인에 대한 수사가 좌초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나라가 떠들썩해지는 사건이 터져도 국회의원들은 수사기관의 소환요구를 거부하며 수사를 무한정 회피해 왔던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국회에 대한 정권의 탄압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던 시절에는 불체포특권의 필요성이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어느 정도의 민주화가 이루어져 국회에 대한 공공연한 탄압이 사실상 어려워진 환경에서 불체포특권은 다른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당초 취지에서 벗어나 정략적으로 악용되고 있는 불체포특권은 시대환경의 변화에 맞게 고쳐지거나 폐지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불체포특권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단지 법률개정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불체포특권을 명문화하고 있는 헌법조항을 개정하는 절차를 밟지 않고서는 불체포특권은 숱한 문제를 낳으면서도 존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개헌이 있게 될 경우 불체포특권을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44조에 대한 개정이 국민적 요구로 제시될 필요가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국회의원들의 탈법행위가 법의 이름으로 보호받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같아서야 여야 각 정당들이 나서서 불체포특권의 자진포기를 선언했으면 하는 생각이지만, 그게 어디 우리네 마음같이 될 일이겠는가. 각 당의 이른바 '개혁파' 의원들만이라도 국민의 지적을 받고 있는 불체포특권의 자진포기를 선언하면 어떨까하는 바람이 있지만, 그것조차도 과잉기대인 것만 같아 답답하다.
이도 저도 안되면, 결국 우리는 헌법이 개정될 때까지 법앞에서 만인은 결코 평등하지 않음을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불체포특권을 이용하여 국기문란이나 파렴치 탈법행위를 저지른 국회의원들을 보호하는 정당에 대해서는 국민의 힘으로 심판을 내릴 수 있음을 잊지 말자. 결국 믿을 것은 우리 유권자의 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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