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이 되고 있는 대통령 관련 부분 이외에도 3권분립의 실질화, 언론자유의 적극적인 보장, 경제조항의 재검토, 영토(領土)조항의 재검토, 환경조항의 강화 등, 현행 헌법의 많은 조항들에 손을 댈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15년간 우리 사회의 변화를 담아낼 수 있는 헌법개정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제기되고 있는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은 그같은 필요성과는 맥을 전혀 달리하고 있다. 대통령은 외치(外治)에 전념하고 내치(內治)는 총리에게 맡기자는 것이 현재 제기되는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론의 골자이다. 그 동안 드러난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생각하면 사실 그 자체는 공감을 얻을 수도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최근의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론은 배경부터 결론까지 철저하게 정략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다.
우선은 시점의 문제이다. 개헌론자들은 연내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 먼저 개헌을 하고 새 헌법을 가지고 대통령선거를 치르자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12월 대통령선거 일정을 감안하면 이같은 일정은 불가능에 가깝다. 개헌론자들조차도 연내 개헌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원내 과반수에 가까운 한나라당이 반대하고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헌안은 국회발의조차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개헌론자들은 연내 개헌을 주장한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들의 대선행보에 개헌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헌론자들의 입장에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론은 반(反)이회창-비(非)노무현 연대를 구축할 수 있는 명분이자 동력이다. 이같은 개헌론을 내걸어야 무원칙한 야합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있고, 자리배분을 통한 역할분담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헌론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연내 개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정치적 결단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현행 헌법의 개헌 일정 관련 조항을 보면, 개헌안은 국회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이 발의할 수 있고, 발의된 헌법개정안에 대해 대통령이 20일 이상 공고해야 한다.
국회가 공고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의결할 경우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찬성을 얻으면 헌법개정은 확정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정치권의 정치적 결단만 있으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자체가 현재의 개헌론이 갖는 정략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지금에서 개헌의 문제는 단지 정치권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 각 분야의 변화를 헌법에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사회 각계가 참여하는 연구와 토론과정이 필수적이고, 국민의 의사를 물어나가야 한다.
과거와 같이 정치권 내의 힘 혹은 담합을 통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개헌은 지금 할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 기간에만 족히 1-2년은 걸릴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같은 과정과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는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개헌을 이루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현실적 측면을 무시하고 연내 개헌을 주장하는 것은 애당초부터 정치권의 담합에 의한 개헌만을 상정하고 있을 뿐, 국가의 대계(大計)를 위한 개헌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이해당사자들의 대선행보를 위한 개헌주장이라는 정략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정치에 정략이라는 것이 없을 수야 있겠는가. 4자연대도 좋고, 반(反)이회창-비(非)노무현 연대도 좋다. 다 각자의 정치적 소신이고 판단이다. 그걸 누가 뭐라 하겠는가. 자유이다. 문제는 그 방법도 정도(正道)에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노무현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노무현 사퇴하라고 할 일이다. 이회창 후보 싫으면 이회창 반대한다고 하면 되는 일이다. 왜 그러지 않고 비겁하게 말을 돌려 애꿎은 헌법 탓만 하는가. 개헌론을 앞에 내세우고 그 뒤에 몸을 숨기려는 정치세력들의 태도는 어쩐지 떳떳해 보이지는 않는다.
개헌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식의 개헌논의는 아니다.
해법은 간단하다. 불필요한 개헌논란으로 새로운 정치적 갈등을 조장할 때가 아니다. 현실성도 없는 정략적인 개헌논의는 중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 정당과 대통령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개헌 문제를 공약으로 내걸면 된다. 그래서 대선에서 국민의 선택을 거친 뒤, 차기에 들어서게 되는 정부 아래에서 개헌에 관한 사회적 의견을 수렴하고 그 절차를 밟으면 된다. 그것이 합리적이고 정상적이며 투명한 개헌절차이다.
'헌법의 실패'를 부각시켜 자신들의 정치적 활로를 찾으려는 얄팍한 계산 앞에서 이렇게 묻고 싶다. 도대체 헌법이 무슨 죄인가. 모두가 정치권의 죄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