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이지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1984년 군복무 중 의문사한 허원근씨(당시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는 "18년 동안 베일 속에 있던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하나둘 밝혀지고 있는데, 느낌이 어떠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허 일병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 이하 진상규명위)의 조사결과 중간발표가 있은 지 13일만인 3일 7사단 3연대 1대대 3중대(허 일병 사망한 부대)에서 '현장재현 실지조사'가 진행됐다.
이번 현지조사는 최근 '병풍정국' 등과 맞물린 탓에 국민적 관심이 뜨거웠고, 이를 반영하듯 30여 명의 중앙언론사의 기자들이 몰려들어 취재열기로 뜨거웠다.
진상규명위는 실지조사를 위해 김준곤 위원 등 6명과 김학선씨를 포함한 조사관 10명을 현지에 파견했다. 이날 현장에는 허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와 사고당시 허일병의 부대동료였던 참고인 김OO, 최OO, 배OO, 김XX씨 등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이날 실사는 진상규명위 위원들에게 사건 현장을 직접 보여주고, (허 일병의 사망을 둘러싼)주요 진술의 신빙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진상규명위의 위원과 조사관, 진술자 등은 기자들이 현장에 도착한 오후 1시 이전에 이미 주요진술에 대한 상황 적합성을 확인했고, 중대본부의 구조와 시설배치 현황, 사고현장의 주변 상황 등을 직접 파악했다.
진상규명위측은 아직 최종 조사결과 발표가 남은 탓인지 "진술의 신빙성이 확인됐느냐", "새롭게 나온 사실이 있느냐"는 등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이미 발표된 것처럼 오전이 아닌 새벽에 사망했다는 정황증거는 충분하다. 나머지는 최종발표까지 기다려달라"며 극도로 말을 아꼈다.
진상규명위의 개요 설명이 있은 후 당시 허일병과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참고인들의 진술이 이어졌다.
"새벽 1시30분에서 2시 사이에 사망사건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3중대에서 누가 자살했다고 그러더라."(당시 상황실 근무자 최OO)
"새벽에 보안대 허OO 하사의 보고를 받고 대대장이 차를 대기시키라는 명령을 했다. 대대장이 승차후 내가 차문을 닫아줬으니까 대대장이 출발하는 것까지 봤다."(당시 대대장 전령 김OO)
"새벽 6시에 대대장을 태우고 여기 현장으로 왔다. 돌아온 시간은 아침식사 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당시 대대장 운전병 배OO)
"오전에 대공근무를 서다가 2방의 총소리를 들었다. 망원경을 통해 중대본부 쪽을 보니 사람들이 여러 명 모여있었다. 근무가 끝나고 돌아왔는데 같은 분대원 중 한 명이 '현장에서 시체를 옮겨 위장시켰다'고 그러더라. 나는 시체를 보지는 못했다."(당시 3중대 14초소 근무자 김XX)
이들 참고인들의 진술과 관련, 진상규명위 관계자는 "2일 낮 1시 30분쯤 허일병의 사체가 처음 발견됐다는 헌병대의 기존 수사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라며 "사건 은폐 과정에 대대장과 보안부대 관계자가 깊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허 일병이 사망한 장소로 추정되는 중대 내무실(현 폐품창고)로 자리를 옮겨 진행된 조사에서는 모조 시체로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현장조사에 참여한 한 조사관은 "이 자리에서는 총 맞고 쓰러진 상태였는데도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의무대에 연락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중대장은 허원근씨의 더블백을 뒤져 수첩과 공책 등을 빼내 이를 중대장실로 가져갔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사관들은 "사고 후 대대장과 중대장이 2번 이상 전화통화를 했으며, 전화를 받은 대대장이 욕을 했고, 중대를 찾은 대대장은 내무실 바닥에 떨어진 피를 닦는 도중 내무실로 들어오기도 했다"는 증언자 진술도 덧붙였다.
아들의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있던 허영춘씨는 기자들이 몰려들자 "총소리를 듣고 내려온 중대원들이 있었는데 중요한 증인인 그들을 조사하지 않았고, 내무반에 있었던 애들만 불러다 닥달했다. 또 내가 부대 안에서 발견한 핏자국(사고발생 이틀 후)에 대한 조사요구도 묵살했다"며 당시 헌병대의 수사태도를 비난했다. 허씨의 주장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진상규명위가 추가로 확인해야 할 대목으로 보인다.
18년간 자식의 '죽음'을 가슴에 묻어온 허씨는 "아들이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다. 이제 와서 부대 지휘관들의 처벌은 원치 않는다"고 심경을 토로하고는 "다만 진실이 밝혀졌을 때 국군통수권자는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 이날 중대본부 앞에서 실시하려던 총성실험은 하지 못했다.
진상규명위 관계자는 "도로가 새로 뚫리고 막사 주변의 방호벽도 없어지는 등 현장의 지형이 너무 달라져 정확한 검증이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현장조사를 마감하면서 진상규명위측은 "허일병이 84년 4월 2일 새벽 예비역 부사관 노 모씨의 총격을 받아 숨졌고, 이를 자살로 은폐하기 위해 대대급 간부가 참여한 가운데 대책회의가 열렸다는 참고인 이모, 전모씨의 진술이 신빙성이 높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허일병 사건에 대한 최종 조사결과는 오는 10일 발표될 예정이다.
| | <조선일보> 보도 놓고 현장서 '설전' | | | | 이날 실사 현장에선 '허원근씨 의문사'를 다룬 <조선일보>의 보도태도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조사관 중 한 명은 기자 브리핑이 시작되기 전 "모 일간지가 증언자들에게 위협적으로 전화를 해 증언자들이 증언을 꺼리고 있다"며 보도에 신중을 기해줄 것을 부탁했다.
중대 내무반에 대한 실지조사가 열리던 시간에는 <조선일보> 기자와 김학선 조사관 간에 가벼운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 조사관은 "무리하게 증언자들에게 연락을 취할 경우 자칫 그들이 위축돼 증언을 거부할 수도 있다"며 증언자들에 대한 과도한 취재를 자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 기자는 "(증언자들에게 확인하는 것은) 진상규명위에서 발표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의 하나다. 그것을 취재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고 맞서 잠시 논쟁이 일기도 했다. / 홍성식 기자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