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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갯벌에서 십여 년이 넘게 벌어지고 있는 저 소리 없는 총성과 떼죽음, 그리고 제발 전쟁을 중단해달라는 이라크 양민들의 피 어린 호소를 함께 가슴속 깊이 품고 이 길을 떠납니다."

"3보1배, 참회의 기도를 시작합니다." / 복진오 김용남 PD

▲ 3보1배를 시작한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 등 에는 '전쟁반대 평화기원'이라고 적힌 종이를 달았다.
ⓒ 권박효원
'단군이래 최대의 역사(役事)'로 불리는 새만금 방조제 건설 사업을 막기 위해 예순을 앞둔 늙은 성직자들이 세 번 걷고 한 번 절하는 '3보1배'의 고행을 시작했다. 미국의 이라크침공이 한창인 지금, 전쟁으로 희생될 이라크 양민들처럼 방조제 건설로 새만금에서 사라질 무수한 생명들도 똑같이 '값진 목숨'이라는 게 이들이 나선 이유다.

3월 28일 12시 30분,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은 전북 부안군 해창 갯벌에서 서울을 향한 '3보1배'의 첫 걸음을 뗐다. 부안에서 서울까지는 무려 305km. 보통 사람이 하루 8시간, 일주일 이상을 계속해서 걸어야 겨우 도착할 길이다.

수경 스님은 지난해 7월, 불교 신도와 환경운동가들과 함께 북한산관통도로 저지를 위한 3보1배를 서울역에서 조계사까지 해본 경험이 있다. 거리상으로 6km, 5시간 30분을 꼬박 채운 당시의 '3보1배' 중 수경 스님은 실신해 대기하고 있던 응급차에 실려갔다. 세 번 절하고 한 걸음 내딛는 일은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 그러나 이번에는 그 때보다 무려 50배나 힘든 길이다.

그만큼 '새만금을 살리자'는 두 성직자의 각오도 굳셌다. "새만금 갯벌이 농지로서의 가치는 없지만 간척사업은 중단하지 않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표를 접한 두 사람은 "3보1배 밖에는 길이 없다"고 뜻을 모았다.

"죽어가는 이라크의 호소 품고 길을 떠난다
갯벌 살릴 수 있다면, 전쟁도 멈출 수 있을 것"


문 신부와 수경 스님이 새만금 살리기 3보1배에 나서겠다고 처음 선언했을 당시만 해도 환경운동가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두 사람을 말렸다. 그러나 서울을 향한 3보1배를 시작하는 부안 갯벌에서, 문 신부와 수경 스님을 따르겠다는 성직자들이 생겼다. 이희운 목사와 김경일 교무는 전북 부안까지 3보1배에 동참하기로 했고, 김봉술 신부, 전세중 교무, 희문 스님은 28일 하루 동안 그 뒤를 따르기로 했다.

▲ 3보1배를 시작한 지 30분도 안 돼 두 사람의 얼굴은 붉게 상기됐다. 수경스님이 심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 권박효원
문 신부는 이날 3보1배의 고행에 들어가기 앞서 "새만금 갯벌의 떼죽음도, 이라크 침공의 학살도 멈추도록 하자"는 의지를 밝혔다. 문 신부는 인터뷰를 대신한 글을 통해 "새만금 갯벌에서 십여 년이 넘게 벌어지고 있는 저 소리 없는 총성과 떼죽음, 그리고 제발 전쟁을 중단해달라는 이라크 양민들의 피 어린 호소를 함께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길을 떠난다"며 "우리가 새만금 갯벌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어떤 참혹한 전쟁도, 저 터무니없는 죽음과 공포의 행진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수경 스님도 "봄은 왔으나 봄이 아니다"라며 "이는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는 오만한 미 제국의 이라크 침공 때문이자,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외면하는 대한민국 개발독재의 광풍 때문이며, 우리 모두의 가슴 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죽임의 문화와 투쟁의 독 기운 때문"라고 말했다. 수경스님은 또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위하여 제가 먼저 목숨을 바칠 각오로 3보1배 참회의 기도를 시작한다"고 덧붙였다.

쌀쌀한 날씨에도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
"그래도 머리 기댈 곳 있어 축복이네"


28일 낮 부안 해창갯벌을 출발한 두 성직자는 전북 김제로 통하는 30번 국도를 꼬박 하루 동안 '3보1배'로 달렸다. 앞으로 이들은 두 달 동안 이 길을 걸어 군산-홍성-천안-수원-안양을 지나 서울 광화문까지 쉼없이 간다.

3보1배를 시작하기 전 두 사람은 자신들을 걱정하는 지인들과 일일이 악수나 포옹을 나누며 "나는 괜찮다. 이번에는 (쓰러지지 않고) 잘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작한 지 채 30분이 되지 않아 수경스님은 가쁜 숨을 쉬었다. 차분한 표정의 문규현 신부도 절을 할 때마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이미 붉게 상기됐고 아직 쌀쌀한 날씨임에도 얼굴에서 땀이 흘렀다. 아무리 성큼성큼 걷는다 해도 한 번 3보1배로 걷는 거리는 3m가 채 되지 않는다.

▲ 갓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3보1배 수행자들
ⓒ 권박효원
세 걸음마다 한 번씩 합장을 하거나 머리를 숙이며 3보1배 수행자의 뒤를 따르는 200여명 도보 참가자들도 하나같이 숙연하고 무거운 표정이다. 일부 참가자는 "차마 못 보겠다" "1사람씩 교대하면 안 되겠냐"고 혼잣말을 했다.

지난해 3보1배 당시에도 참가자들의 땀을 닦아주며 고행을 지켜보았던 오영숙 수녀는 "이번에 병을 얻으면 평생 갈지도 모른다"며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 수녀는 "무릎 관절이나 다리뼈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땀흘린 뒤 찬 바람을 쐬면 감기에 걸리기 쉽다. 차도에 먼지나 배기가스도 몸에 해롭다"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보다못한 진행자가 수행자들에게 휴식을 권했다. 수행자들이 매트리스를 깔고 땀을 닦거나 물을 마시는 동안 도보참가자들이 달려들어 발이나 어깨, 다리 등을 주물렀다.

휴식시간을 틈타 오영숙 수녀는 "이제 반 오셨네요. 시작이 반이니까 앞으로 반만 더 가면 되네요"라고 격려의 말을 걸었다. 누군가 문규현 신부에게 "감옥에 있는 것과 3보1배하는 것 중에 어떤 게 더 낫냐"고 물었다. 문 신부는 절하는 시늉을 하며 "머리 기댈 곳이 있는 게 큰 축복이네. 다신 (감옥에) 들어가고 싶진 않아"라고 답했다.

▲ 새만금 장승들이 세워져있는 전북 부안 새만금 해창갯벌
ⓒ 권박효원
꿀같은 휴식시간은 길어봤자 10분. 수행자들은 3보1배를 시작한지 2시간만에 공터에 앉아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이날 식사는 부안성당 신도들이 마련했다. 이후에도 해당 지역 성당, 교회, 절 등이 돌아가며 식사를 준비하지만 수행자들은 따뜻한 방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 "고행 중에 식당이나 숙소에 들어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두 사람의 뜻에 따라 2달 동안 모든 숙식은 길 위 천막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다.

이날 3보1배 참가 종교인들은 수행 시작에 앞서 성명을 내고 "농지조성 목적의 새만금 간척이 의미 없다면 방조제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농림부와 농업기반공사가 간척사업에서 물러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우리의 무기는 기도할 수 있는 마음과 고행할 수 있는 맨몸이다.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생명의 소중함과 평화의 아름다움을 말할 것"이라고 밝혔다.

"3월 28일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멀리 국회 앞에서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

이날 '3보1배'에 돌입한 문정현 신부의 동생인 문규현 신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형님 슬프게 하면 안 되지. 무리하면 안 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먼 길을 떠나는 동생에게 "차라리 3월 28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형 문정현 신부는 국회 앞 파병동의안 처리를 저지하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 서울로 떠났다. 문규현 신부는 형에게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온다는 믿음으로 생명과 평화를 지키겠다"고 답했다.

김원웅 개혁당 대표는 지난 2000년도부터 새만금 관련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왔다. 이번 3보1배에 대해서도 오래전부터 "새만금을 지키는 일인데 당연히 오겠다"고 말했던 김원웅 대표는 그러나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국회 안에서 파병동의안 관련 전원위원회에 참석한 김원웅 대표는 대신 "대전 근처로 오면 개혁당원들과 함께 찾아가겠다"며 "국회 안에서 새만금을 지키는 노력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 권박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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