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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정치드라마의 신호탄은 5공 청문회였다. 특히 청문회에 출석한 전두환 전대통령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의 지휘관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라고 증언하자 벌떡 일어나 자신의 명패를 던져 청문회가 무산된 일은 국민들에게 한편의 영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런 ‘노무현’과 ‘전두환’이 다시 만났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 시절 완료하지 못한 전두환씨의 미납 추징금 환수가 현정부에 맡겨진 것이다. 전씨의 미납 추징금 1891억원은 재산명시신청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와 있고, 전씨는 다시 법정에 서게 생겼다.


▲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96년 12월 16일 나란히 서서 '5.18재판'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1996년 3월 군사반란 및 내란혐의로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은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정치자금 명목으로 기업들에게서 비자금을 조성한 바가 밝혀져 1997년 대법원은 두 전직대통령에게 각각 2205억원과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했다. 하지만 79%에 이르는 추징율을 보이는 노태우씨와 비교해 전두환씨는 징수율이 14.3%로 현저히 낮아 여론의 질타가 더 심하다.

그동안 노태우씨는 총 2073억원의 추징금을 냈다. 1300억원에 달하는 가차명 예금을 비롯해 나라종금에 신탁했던 248억원(이자 제외), 그리고 한보, 쌍용 등의 기업에 빌려준 돈을 검찰이 속속 밝혀낸 덕분이다. 반면 전씨는 달랐다. 본인 것임을 밝혀낼 수 있는 채권과 예금은 고작 314억원. 2000년에는 검찰이 전씨 소유의 87년식 중고 벤츠와 아들 명의의 콘도회원권을 경매 처분까지 했지만 그래봤자 2억원에 불과한 액수다.

여기에 검찰이 강수를 뒀다. 지난 2월 검찰은 법원에 재산명시 신청을 했다. 재산명시 신청이란 재산이 있으면서도 빚을 갚지 않는 채무자의 재산목록을 공개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하는 제도.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3년 이하 징역 500만원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전씨의 ‘숨은‘ 재산에 대한 검찰의 최후 통첩인 셈이다.

이철희 전 담당검사는 “전두환씨는 무기명 채권이 많아 수사의 어려움이 많았다”며 “법적 구속력을 갖는 방법을 찾던 끝에 취하게 된 조치”라고 밝혔다.

검찰의 ‘전두환·노태우 재산 찾기’ 특명은 그 역사가 꽤 길다. 1995, 96년 7명의 검사와 50명의 수사관이 팔을 걷어 부치고 6개월 동안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추적했지만 전씨의 ‘숨은 돈’을 찾진 못했다. 당시 검찰은 압수한 전씨의 무기명 장기채권과 일련번호가 이어지는 채권(842억원)을 포함해 1천8백억원대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체를 규명하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다시 1998년 ‘전·노 비자금 추적반’이 가동되었지만 “추징금 전액 징수”에는 역시 실패했다. 당시 수사팀을 진두지휘한 안강민 부장검사(현재 안강민법률사무소 대표)는 “전두환씨의 경우 심증은 있었지만 재직한 때로부터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추적이 어려웠다”고 소회한다.

한때 시장을 교란할 정도의 구권 화폐가 쏟아져 나와 신권으로 암거래되고 있다는둥, 상당한 금액이 차명으로 예금되어 있는데 ‘이자는 니가 먹고 나중에 원금만 돌려달라’는 식으로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는둥, 소문만 무성했다.

반면 노태우씨는 대부분 ‘드러나는’ 재산이라 추적이 쉬웠고, 또 남은 주식들이 있어 완납가능성이 높다.

한편 전두환씨의 법정출두 가능성을 두고 다른 얘기도 나온다.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 서는 불명예를 거치지 않기 위해 전씨측에서 다각도로 ‘액션’을 취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검찰이 재산명시 신청을 했을 때 전두환씨측에서는 즉각 이의신청을 했다. 전씨의 변호를 맡고 있는 이양우 변호사는 이의신청서에서 “남은 재산이 없다”며 “1995년 광범위한 수사를 벌였고 또 공직자 재산등록 현황을 통해 본인의 재산현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국가가 재산명시를 신청한 것은 위법”인데다, “확정된 추징금 2205억원 가운데 상당부분은 이미 선거비용으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다 돌연 지난 11일 이의신청을 취하하면서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비춰 여러 추측을 낳고 있다.

일단 전씨측에서는 “각하께서 재판장에 서는 모습이 좋지 않다, 그래서 협조하겠다는 뜻을 검찰에 전달했다, 우리는 (검찰측에서 재산명시신청을) 취하된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이양우 변호사는 전씨의 재산추적을 위한 국세청과 금융기관의 전산조회에 협조하겠다는 동의서와 전산조회 결과에 따르겠다는 확약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이렇게 되면 검찰의 재산명시 신청은 기각될 수 있다. 채무자의 재산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경우 법원은 이를 기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씨측의 짐작과 달리 검찰측은 “일정대로 간다”는 입장이다. 추징금 수사를 맡고 있는 서울지검 총무부 최찬묵 부장검사는 “취하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거듭 밝혔다.

▲ 전두환씨의 연희동 집은 이순자씨 소유라 강제 추징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재산명시신청 외에 전씨의 미납 추징금 환수를 위한 ‘법적’ 조치는 두 가지 길이 더 남아 있다. 하나는 유일하게 남은 전씨 명의의 재산, 연희동 별채를 강제 처분해 얼마 남지 않은 추징금 시효를 3년 더 연장하는 방법이다. 2000년 벤츠 승용차를 경매처분한 뒤로 추가된 추징금이 없어 오는 5월 12일로 시효만기가 될 수 있었으나, 그 전에 단 1원이라도 추징한다면 시효는 다시 연장된다. 그렇게 일단 시간을 번 뒤 검찰은 전씨의 재산을 찾기 위한 수사를 벌이겠다는 계획이다.

파산선고도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신용이 끊기고 공무담임권 등 법적 자격마저 박탈돼 사실상 사회적 식물인간에 해당하는 파산선고를 스스로 내릴 리는 없어 보인다. 검찰측에서도 고의적인 채무 불이행자에 한해 파산선고를 내릴 수 있지만 이에 대해 검찰 측의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는다.

민변의 김선수 사무총장은 “무엇보다 검찰의 적극적인 의지가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더욱이 두 전직 대통령의 추징금은 단순히 채무의 차원을 넘어 국가적 형벌의 의미가 크기 때문에 검찰의 수사력으로 해결해야 맞다. ‘명패 던진’ 노무현 정부의 마무리가 남았다.

가난한 아빠, 부자 아들
전씨 장남 재국씨, '시공사' 키우며 출판계 거물로

1989년 시공사(2001년 기준 총자산 204억)로 시작된 전재국씨의 사세확장은 빠르게 진행돼 왔다. 책 도매상 동국출판판매(2002년 기준 총 자산 190억)의 대주주가 된데 이어, 홍대 앞 미술전문서점 아티누스를 직접 경영하면서 서점 운영에 관심을 보이더니, 재작년엔 서울에서 네 번째로 큰 을지서적을 인수해 출판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 속속 전국 주요도시에 대형서점들을 오픈하고 있다. 벌써 9개나 된다.

또한 2000년엔 인터넷 서점 리브로(2001년 기준 총 자산 180억)를 오픈했고, 급기야 서울북클럽이라는 창고임대업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그야말로 출판, 유통, 임대에 걸쳐 온·오프를 넘나드는 출판계의 큰손이 된 것이다. 그 사이 모회사인 시공사는 매출액이 300억원으로 늘어 출판계의 선두그룹으로 급부상했다.

전재국씨의 사업자금에 대해서는 아버지인 전두환씨의 비자금이 흘러갔다는 추문이 늘 따라다녔다. ‘특종감’인 그 의혹에 여러 기자들이 뛰어들기도 했지만 아직 터진 건 없다.

그렇다 해도 사업 초기 아버지로부터 출판사 부지를 물려받은 것은 본인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의식해선지 그는 좀체 사업체 밖으로 얼굴을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대주주로서 군림할 뿐이다. / 박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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