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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그대 마음에 찬바람이 불어오고
모질고 험한 시련의 언덕을 넘을 때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어 갈 때
누군가 그대를 위하여 등불이 되어 준다면
그대의 꽁꽁 언 손을 붙잡아 준다면
얼마나 큰 기쁨과 위로가 될 것인가.
.........(중략)
(박철 시. 등불)


한밤중 전깃불이 나가면 사방이 어둠의 포로가 된다. 마침 교회에서 저녁예배가 있는 날에는 어쩔 수 없이 촛불을 켜고 예배를 드린다. 촛불을 켜도 어둠이 다 가시는 것은 아니다. 간신히 성경이나 찬송가를 읽을 정도이다. 예배가 막 시작되었는데, 갑자기 전깃불이 들어온다. 조금 전까지 어둠에 익숙해 있다가 전깃불이 들어오면 세상이 더 환해 보인다.

아, 빛이란 어둠이 있어야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다. 밝은 대낮에 전깃불을 켜놓는 사람은 없다. 일찌기 우리의 스승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 고 선언하셨다. “빛이 되어라” 고 말씀하시지 않고 “빛이라”고 선언하셨다.

유년시절 아버지는 나를 화천읍내 화천초등학교에 보내셨다. 동네에 작은 학교가 있는데, 나의 아버지는 누나와 나를 읍내 학교에 입학시켰다. 내가 좋아서 결정한 일도 아니고, 내가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서 동네 학교를 안 다니고 읍내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다.

장장 30리길을 걸어 다니면서 ‘왜 나는 가까운 학교를 놔두고 30리 길을 걸어 읍내에 있는 학교를 다녀야 하는가?’하는 고민이나 물음도 없이 내 발걸음이 인도하는 대로 아침이면 눈 비비고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학교엘 갔다.

나는 주목받는 학생이 아니었다. 숫기도 없고 발표력도 없었다. 어디서 꿔다 논 보리자루 모양 나는 늘 한쪽 구석에 있었을 뿐이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학용품이 없었다. 공책도 누런 마분지를 잘라 꿰매어 썼고 연필은 몽당연필이었다.

선생님이 교실에서 굴러다니는 연필이 있으면 “연필 잃어버린 사람 누구고?” 하고 아이들에게 묻는다. 그러면 나는 언제나 손을 들었다. 선생님도 내 연필이 아닌 줄 다 알고 계셨을 것이다.

나는 늘 누나를 기다렸다. 내가 누나보다 아래 학년이어서, 수업이 먼저 끝나기 때문에 누나 수업이 끝나야 같이 집엘 온다. 누나는 나와 같이 다니는 게 창피했던지 읍내를 벗어날 때까지 늘 간격을 두고 따라오란다. 그러는 누나에게 불만이 없었다.

추운 겨울, 학교수업을 마치고 청소까지 하고 집에 오다보면 금방 날이 어두워진다. 바람은 세차게 불고 눈까지 내린다. 강원도 산골 눈바람이 인정사정없이 어린 두 남매에게 불어온다. 손도 얼고, 발도 얼고, 온몸이 꽁꽁 언다.

이 삭막한 시절, 밝을 등불을 들고(빛이 비치면 어둠은 이내 물러가고 만다)
이 삭막한 시절, 밝을 등불을 들고(빛이 비치면 어둠은 이내 물러가고 만다) ⓒ 느릿느릿 박철
거의 동구 밖까지 오면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집집마다 호롱불빛이 가물가물하다. 누나와 나는 참았던 울음이 터진다.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동네까지 다 걸어와서 왜 거기서 울음이 터지는 것일까?

내가 “아이구, 발 시려!” 하고 울면 누나는 “아이구, 귀 시려!”하고 울었다. 동구 밖에서 집에까지 큰 소리로 울면서 집엘 온다. 그러면 어느 때는 어머니가 호롱불을 들고 마당에 나와 ‘애들이 올 때가 되었는데, 왜 안 오나?’ 하면서 서 계신다. 어머니가 등불을 들고 마당에 나와 계신 걸 보는 순간, 우리 남매는 더 큰 소리로 운다.

어머니가 우리를 보고 “얘들아. 춥지? 학교 갔다 오느라고 애썼다.” 고 하시면 우리 남매는 어머니 옷소매를 붙잡고 방에 들어가 따뜻한 아랫목에서 몸을 녹였다.

지금 내 나이가 쉰이 다 되었다. 그 때 어머니 나이보다 훨씬 많은 나이가 되었다. 가끔 아이들이 자율학습이니 해서 밤에 차로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 때가 있다. 나를 기다리다 걸어오는 아이들을 대룡리 사거리에서 만나면 반갑기도 하고, 마음이 짠하기도 하다.

나의 스승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는데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내가 빛이 될 만한 아무런 요소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내가 빛으로 살아야 하는 데 도리어 지금 어둠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밝은 대낮의 사람으로 살지 못하고 어두운 밤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참으로 외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외롭다. 또 외로움의 정체는 내가 이웃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빛이 될 수 없다. 나에게서 빛을 발할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다. 다만 나의 영적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온 몸으로 받아 그것을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 나는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에 불과하다.

예수의 사랑의 빛을, 진리의 빛을 반사하기 위해 나를 잘 닦아야 한다. 유년시절, 개울가에 가서 조심스럽게 짚으로 호야를 닦듯이 시방 그런 심정으로 나를 닦고 있을 뿐이다. 나의 유년시절, 호롱불을 들고 집 마당에 나오셔 우리 남매를 기다려주셨던 어머니의 심정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지금 그대 마음에 등불이 있는가?

아하 그렇구나.
아름다운 사람은 이렇게 그 자체로
사람을 설레게 하고
사람을 성찰하게 하고
내 안의 아름다움을 밝히게 하는구나.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가려면
내가 먼저 아름다운 사람이어야겠구나.
내가 있음으로 자신이 한 번 더 돌아봐지고
내가 있음으로 자기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
자신을 망치는 것들과 치열하게 싸워나가는
아름다운 등불로 걸어가야겠구나.
나이 들수록 더 푸르고 향기 나는
아름다운 사람의 등불로
다시 그 등불 아래로
(박노해 詩. 아름다운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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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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