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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뜨거운 열광의 대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차가운 경멸의 대상이기도 한 대중문화. 모순적인 그 이중성은 여전히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지만, 그래도 대중문화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조금씩 해소되고 있는 중이다. 예전 시각으로 보자면 대단한 위인들에게나 어울렸을 전기(傳記)가 이제 유행가 가수까지 대상으로 삼게 된 것만 봐도, 그러한 해소의 흐름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지금으로부터 딱 60년 전인 1943년 무렵 조선 제일의 유행가 가수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백년설(白年雪)(1915-1980). 그의 삶과 노래를 소박하게나마 정리한 책 <오늘도 걷는다마는>(이상희 지음·도서출판 선·2003)이 얼마 전 출간되었다.

요즘은 원로 대접을 받고도 남는다지만 백년설과 비교하면 후배도 한참 후배인 이미자, 신중현의 자서전까지 이미 나온 마당에 백년설 전기가 출간된 것이 뭐 그리 특기할 만한 일이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것, 게다가 좀 묵은(아주 묵은 것도 아닌) 것이라면 이상하게도 대접이 소홀해지는 요사이 풍토를 생각해 보면 <오늘도 걷는다마는>은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의 제1세대로 1945년 이전에 활동을 시작해 한 시대를 풍미하다 세상을 떠난 가수들이 숱하게 있지만, 그 가운데 어떤 가수에 대해서도 전기가 나온 적은 없었다. 저 유명한 남인수, 이난영조차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으니, 이번에 백년설 전기가 나온 것은 그야말로 ‘최초’의 의미를 가지는 셈이다.

지은이는 특히 가수 백년설이 아닌 자연인 이갑룡(백년설의 본명. 나중에 이창민으로 개명)에 관한 여러 가지, 예컨대 성장기·가족·결혼·종교생활 등에 대해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기록과 증언이 극히 부족한 가운데 그만한 내용을 모아 정리하기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수 백년설과 백년설이 활동하던 당시의 가요계에 대한 서술에서는 부족하거나 잘못된 점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연도·인명·가사 등이 잘못 표기된 것은 그나마 간단한 오류라 하겠지만, 처녀림이란 예명을 한쪽에서는 작사가 박영호의 것이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작사가 조경환의 것이라 하여 같은 책 안에서도 서술이 엇갈리는 것은 그냥 보아 넘기기 어려운 문제이다.

더구나 백년설의 대표작인 '나그네 설움'이 민족의식을 배경으로 해 만들어졌다고 설명하는 대목에서 1937년 6월에 일어난 보천보사건을 마치 1938년에 일어난 것처럼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들은 지은이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자료가 너무나 빈약하고 있는 자료마저도 부정확하기 때문에(특히 개인적인 증언) 발생한 경우도 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다소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랬다더라’하는 식의 확인할 수 없는 증언을 최대한 배제하고 폭넓은 자료 수집에 노력을 기울였다면 한층 객관적이고 정확한 전기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백년설이 부른 노래 가운데 친일적인 내용이 담긴 것이 있다는 점이 얼마 전 시비거리가 되었던 것을 의식했음인지, 지은이는 문제가 되었던 몇몇 작품들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사실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으므로, 그러한 시도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는 면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

다만 백년설이 지원병으로 나가기 위해 혈서를 썼다느니, 군국가요를 불러 거액의 부당한 금전을 취했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매도가 횡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므로, 다른 문제에 앞서 확실하게 그러한 잘못된 주장의 부당함을 밝혔어야 했을 것이다.

노래를 아는 이들은 알겠지만, <오늘도 걷는다마는>이라는 제목은 '나그네 설움'의 첫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 ‘정처 없는 이 발길’이 또 묘하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백년설 전기가 나왔다고는 하지만 그의 삶과 노래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부분,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백년설에 관한 연구는 아직 ‘정처’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걷는다마는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 정지창 칼럼집

정지창 지음, 한티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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