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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은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고, 마음은 비단결이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입니다. 덕동 계곡으로 유명한 곳에 교회가 있어서 우리 가족은 8년 동안 김 목사네로 여름휴가를 갔습니다. 해마다 아이들이 자란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흐뭇한 일이었습니다. 사모님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피아니스트입니다. 한밤중 평상에 앉아서 별을 보며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면서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남양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내렸습니다. 김목사를 오후1시에 수원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차에서 내려 대합실로 들어갔더니 김 목사가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우리 둘은 반가워서 손을 꼭 잡았습니다.
“아니, 토요일 날 바쁠 텐데 나를 보자고 하고. 그래, 무슨 일인데?”
“아무 일도 없어요. 형님도 보고 싶고, 내가 형한테 전해 줄 물건이 있어서요.”
“그래? 그게 뭔데?”
“잣 효소예요. 내가 사는 데가 잣이 많잖아요. 가을에 산에서 잣을 따다 효소를 만들었는데, 형님 생각이 나서 맛 좀 보시라고 갖고 왔어요.”
버스 대합실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잣효소를 전해줄 거면 택배로 보낼 수도 있는데 일부러 나를 만나러 그 먼데서 예까지 온 것입니다. 김 목사는 잣 효소가 담긴 프라스틱병 두 개를 나에게 건네주었습니다. 토요일은 목사들에게 제일 바쁜 날입니다. 나는 수원까지 30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지만, 김 목사는 자기 집에서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4-5시간이 걸리는 매우 먼 거리였습니다. 보통 정성이 아니었습니다. 김 목사의 마음을 내가 잘 알지요.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둘은 터미널 근처 식당에 가서 국밥을 먹었습니다. 국밥을 먹는데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김 목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 내가 잠깐 구둣방에 가서 구두를 하나 사야겠어요. 지금 신고 있는 것이 다 되어서….”
김 목사가 신고 있는 구두를 보니 뒤축도 다 닳고 너덜거렸습니다. 구둣방에 가서 기성화 구두를 하나 샀는데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 목사가 한사코 구두 값을 내겠다는 것을 가로막고 값을 내가 냈습니다. 김 목사는 물질적으로 매우 가난한 목사입니다. 교회도 작고 교인도 많지 않아 사모님이 면소재지에 나가 피아노 레슨을 해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늘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아쉬운 작별을 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남양으로 오는데 차 안에서도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좀 더 좋은 걸로 사줬어야 했는데’하면서….
1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 후로 우리는 교동으로 이사를 왔고, 김 목사네는 지금도 덕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올 여름휴가 때는 사정이 있어서 우리가 그쪽으로 가지 못해 만나질 못했습니다. 김 목사가 보고 싶습니다. 사모님, 그리고 광현이와 현지도, 다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