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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가 서준식
인권운동가 서준식 ⓒ 야간비행
1988년 초인가에 기자 초년병 시절 '옥중서신' 형태로 접한 서준식이 쓴 '나의 주장'의 한 대목이다. 1948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인 서씨는 1967년 고등학교를 마치고 재일교포 모국 유학생으로 서울대에 입학한다.

그러나 남달리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는 창녀와 거지, 그리고 지게꾼으로 넘쳐나는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실망해 1970년 서울법대 3학년 여름방학 때 작은형 서승의 권유로 8일간 북한을 함께 방문하게 된다.

그 이듬해 보안사령부는 1971년 대통령 선거 6일 전에 서승-서준식 형제 등 51명이 연루된 이른바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호기심 어린 약관의 나이에 감행한 7박8일간의 북한 방문 때문에 그는 7년형을 선고받고, 또 형기를 다 마치고서도 2년마다 '보안처분'을 당해 9년을 더 보안감호소에서 지내게 된다. 단지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북한 방문 하루 당 2년 꼴로, 꼬박 16년을 1.7평짜리 독방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보안감호처분 무효확인소송 및 보안관찰법에 대한 위헌심판 청구의 소를 제기해 1988년 5월 마침내 이념으로 무장한 국가폭력의 터널을 제 발로 걸어나왔다. '나의 주장'은 바로 그가 보안감호처분 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하면서 쓴 글이다.

"나는 지금 당신들에게 아무런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환상을 품지 말 것을 1차, 2차 소송을 통하여 나에게 똑똑히 가르쳐준 것은 바로 당신들이었다. 법이란 궁극에 있어서 '폭력'에 지나지 않음을, 기본적 인권 조항이란 결국은 정치 권력에 의하여 제멋대로 해석되고 농락 당하는 '갈보'임을 나에게 똑똑히 가르쳐 준 것은 바로 당신들이었다. 이제 만 9년의 보안구금을 당하고 있는 나는 이번 3번째 소송에 대하여 그 어떠한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패소를 해도 패소를 해도 또다시 패소를 거듭해도, 나의 입각점은 한없이 강하다. 나는 나의 이 비할 데 없이 강한 입각점에 굳건히 서서 당신들에게 '필부의 뜻'이야 말로 빼앗기가 어려운 것임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끝없이 강한 이 입각점에 굳건히 서서 확신한다. 패소해도 패소해도 또 패소해도, 역사는 결코 서준식에게 패배를 선고하지 않을 것임을!"


그는 이른바 '전향서'를 쓰지 않은 채로 남한 당국이 쇠창살 밖으로 내보낸 '최초의 좌익수'이다. 그 이후 비전향 장기수들을 수용하기 위해 75년에 제정된 사회안전법이 헌법재판소의 위헌심판 결정을 받아 89년에 폐지되면서부터 이 땅에는 비전향 장기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내걸고 48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한 서준식의 승리였다.

"나는 '자생적 공산주의자' 서준식을 여전히 존경한다"

그때 나온 출소자들은 대부분 김대중 정부 시절에 북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7박8일 북한 여행의 대가로 17년의 옥살이를 안긴 조국에 넌더리가 날 법도 하지만, 한때 로동당에 입당했던 북한도, 그가 태어난 일본도 택하지 않고 남한 땅을 지키고 있다.

나는 그가 쓴 '나의 주장'을 읽고서 비로소 인간이 올바르게 산다는 것의 경지를 깨달았다. 물론 인간이 양심의 울림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함께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내가 아는 유일한 '자생적 공산주의자' 서준식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른바 진영(陣營)으로서의 공산주의가 붕괴한 지금, 그가 지금도 공산주의 사상을 '포지'(抱持)하고 있는지는 내가 알 길이 없다. 그의 '내심'을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소 이후 줄곧 인권운동가의 길을 걷고있는 서준식은 얼마 전에 <서준식의 생각>을 펴내면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여전히 사회주의를 '예찬'했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자본주의 구조가 악의 구조라고 생각한다. 이 구조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이 불쌍하다고 생각을 한다. 자유와 평등의 참뜻이 사회주의적 발상에서 올바르게 구현된다고 본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언제 어떤 형태로 사회주의가 구현될지 모르지만, '사회주의는 나쁘다'고만 말하지 말고 새로운 사회주의, 문제가 없는 사회주의를 만들자."

나는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한 적이 없는' 서준식을 여전히 존경한다. 그는 여전히 내가 아는 바, 유일한 '실천하는 좌파'이다. 그러나 내가 그를 여전히 존경하는 까닭은 그가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언제 끝이 날지 모를 거대한 국가폭력에 맞서 끝까지 사상과 양심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낸 나의 '우상'(偶像)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일본에 '귀화'하지도 자본주의에 '전향'하지도 않은 채 "이성이 폭력적 구조의 벽에 부딪치는 지점부터는 어쩔 수 없이 '입'이 아닌 '근육'이 현실의 어둠을 뚫고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면서 "이 사실을 망각하는 모든 글쓰기는 미망(迷妄)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나 같은 사람을 질타하면서 꿋꿋하게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북한 민주화운동'으로 180도 선회한 '주사파의 대부' 강철 김영환

지난 97년 10월 대통령선거를 두 달 앞두고 울산에서 이른바 남파 부부간첩인 최정남·강연정씨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최씨의 '상부선'이었던 아내 강씨는 당시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던 중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독약 앰플을 깨물어 자살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99년 7월말 중국에서 2년 동안 체류하던 '강철' 김영환씨가 극비리에 귀국했다. 그전에 김씨는 은밀하게 정부 당국에 귀국 탄원서를 냈었다.

북한민주화운동가 김영환
북한민주화운동가 김영환 ⓒ 월간 말
'강철 김영환'은 일반 국민에게는 낯선 인물이지만, 이른바 386세대, 즉 60년대에 출생해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0대, 특히 80년대 중후반부터 10년 동안 대학 운동권을 휩쓸었던 주사파 학생들한테는 가히 '신화' 같은 존재였다. 그는 80년대 중후반 이른바 NL(민족해방) 운동 진영의 행동 지침서였던 '강철 시리즈'의 필자로서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이후 10년간 학생 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론가였다.

귀국 후 김씨는 서울 시내 R호텔의 국정원 안가에서 국정원의 베테랑 대공수사관들로부터 이른바 '사상전향 심사'를 받았다. 한 인간의 과거 모든 행적과 내심까지를 샅샅이 살피는 치열한 심사였다.

한때 '남한 주사파의 대부'였다가 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수령론을 '사기극'이라고 비판한 강철 김영환과, 남한 내 주사파를 색출하는 일을 본분으로 삼는 국정원 대공수사국 수사관들과의 약속된 만남은 그의 과거의 모든 행적을 검토하는 사상 심사를 의미했다.

네 차례의 국정원 조사에 협조했던 그가 느닷없이 홍콩으로 출국을 시도하다가 김포공항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구속 수감되는 등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밀입북해 김일성을 두번이나 만난 그는 50일 동안의 구속 수사 끝에 준법서약서에 해당하는 '반성문'을 쓰고 '공소보류' 조치로 풀려났다. 공소보류는 전향 간첩에게 내려지는 국가보안법상의 예외조항인데, 기소유예가 아닌 공소보류 판정을 받은 것은 김영환씨가 처음이었다.

그는 2년간의 공소보류 기간이 끝나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지만,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99년 10월에 김씨를 단독으로 만나 인터뷰를 할 때만 해도 김씨는 불안하고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국정원과 검찰이 매달아 놓은 공소 보류라는 '꼬리표' 때문이 아니라, 전향과 공소보류의 대가로 그가 전념하기로 작심한 '북한 민주화운동'과 '김정일 정권 타도 투쟁' 같은 과업이 불러올지도 모를 신변의 위협 때문이었다.

송두율과 김영환의 같고도 다른 점

김영환씨는 지금도 황장엽 전 로동당 비서와 함께 강연과 글쓰기를 통해 '북한 민주화운동'과 '탈북자 돕기 운동', 그리고 '김정일 정권 타도 투쟁'을 벌이고 있다. 공교롭게도 김씨와 황씨는 재독 철학자 송두율씨(독일 뭔스터대 강사)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수사중인 검찰에서 증인 혹은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황씨는 망명 이후 안기부(현 국정원)에 송두율씨가 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임을 제보한 장본인이고, 김씨는 로동당 입당 이후 친북활동을 할 때 북측으로부터 '해외에서 김철수를 접촉하라'는 '지령'을 받은 바 있다.

이와 관련, 김씨에게 접촉을 시도했으나 김씨는 전화통화에 응하지 않았다. 제3자가 전하는 김씨의 심경은, 송씨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던 황씨처럼 송두율씨에 대한 어떤 입장을 밝히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이처럼 한때 자생적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였다가 이제는 각각 '남한 인권운동가'(서준식)와 북한 혁명(해방)론을 전파하는 '북한 민주화운동가'(김영환)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의 행보는 송두율 교수 사건에도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선 사법처리와 관련해서는 김영환씨 사례가 이번 송 교수 사건 처리에서도 하나의 준거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당시 김씨도 송씨처럼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사실이 확인되고(반국가단체 구성), 북한에 가서(잠입·탈출) 김일성 주석 등 고위층과 만나(회합·통신) 자금을 받는(금품수수) 등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사실이 본인의 자백과 국정원의 추궁에 의해 드러났다.

다만, 사실관계가 다른 점은 김씨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만들어 중앙위원으로 활동한(반국가단체를 구성해 수괴의 임무에 종사한 자)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 반면에, 송씨는 논란이 되고 있는 '당 서열 23위인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로 활동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는 점이다. 국가보안법 제3조 2항은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돼 있다.

아무튼 국정원이 '민혁당' 사건을 처리한 방식은 과거 간첩사건에서 보여준 처리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띠었다. 국정원의 민혁당 간첩사건 수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이 사건에 연루된 김영환씨 등은 '명백한 간첩'이었다. 김씨는 91년 밀입북해 노동당에 정식 입당후 2주간의 '기본교육'을 받고 김일성 주석을 접견해 남한에 주체사상을 널리 전파하라는 교시와 함께 공작금 40만달러를 받아 '지하당'의 조직관리를 해왔다.

국정원이 '똑 떨어지는 간첩' 김영환을 공소보류 결정한 사정

민혁당 사건 체계도
민혁당 사건 체계도
그런데 국정원은 이처럼 '똑 떨어지는 간첩'을 공소보류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당시 국정원이 취한 사법적 판단 기준은 '전향' 여부였다. '전향'한 김영환·조유식 2인은 공소보류 의견으로 송치하고, '미전향'인 하영옥·심재춘 2인은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그리고 검찰은 '간첩 잡는 전문가 집단'(국정원 대공수사국)의 의견을 존중해온 관례대로 김씨와 조씨는 공소보류하고, 하씨와 심씨는 구속 기소했다.

당시에도 김영환·조유식 2인에 대한 다소 파격적인 공소보류 결정은 형평성과 관련해 논란이 있었다. 이 사건의 수사 실무책임자도 당시 두 사람에 대한 전향 판단과 반성문 말고도 정부의 대북정책과 국가보안법 사건의 신중한 사법처리 방침 등이 고려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수사 책임자는 하영옥·심재춘 2인에 대해서는 남파간첩(원진우)의 활동을 직접 도와준 데다가 반성의 기미가 없기 때문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거물간첩 송두율'을 구속 수사하지 않고 자유롭게 '출퇴근 조사'하도록 하는 현실에 대해, 한쪽에서는 '망국적 현상'이라고 개탄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 사회의 원숙함'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때도 국정원은 80년대 중후반 이른바 NL(민족해방) 운동 진영의 행동 지침서였던 '강철 시리즈'로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이후 10년간 학생 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론가에서, 북한의 인권과 민주화를 촉구하고 북한 혁명(해방)론을 전파하는 활동가로 변신한 그에게 최대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목적은 단 한 가지였다. 북한과 연계된 과거의 모든 행적을 숨김없이 낱낱이 털어놓게 하는 것이었다.

민혁당 간첩사건의 실무책임자였던 김00 단장은 기자에게 당시 "김영환은 예상보다 더 빨리,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자신의 행적을 털어놓았다"고 말했다. 89년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했고, 남파간첩 윤택림(로동당 사회문화부 부부장)에게 포섭되어 91년 북한을 다녀오고, 김일성을 두 차례나 만나 공작금 40만 달러를 받았고 등등….

송두율 교수가 이 땅에 들어와 취한 '모호성'과 논리의 모순

대공수사의 베테랑인 김00 단장이 '거물간첩' 김씨를 호텔에서 조사하는 등 그에게 최대한 자유로운 분위기를 제공한 데는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공안적 시각에서 보면, 그에 대한 이념 전문가들의 '사상 검증'은 이미 끝난 뒤였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전향을 하지 않고서는 '수령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그런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할 수 없다는 것이 북한 연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그가 주체사상을 전파했던 숱한 젊은이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특히 한때 '혁명 동지'였던 하영옥·심재춘씨는 실형을 받고 그는 공소보류 되었기 때문에 비난이 더 컸다. 그러나 그들에게 반성(전향)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 '반성'의 기회를 잡지 않았을 뿐이다.

반면에 김씨는 젊은 날 자신의 사상적 방황 탓에 너무 많은 청년학생들을 주체사상으로 '오염'시킨 후과(後果)가 너무 컸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더 극한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논리는 이런 연원을 가진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그가 주체사상을 전파할 때는 물론, 그 이후 '김정일 정권 타도 투쟁'을 할 때도 언뜻언뜻 비친 그의 영웅주의적 거대담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반성'(전향)으로 과오를 털어버린 그의 선택의 불가피성을 나는 존중한다.

이에 비해, 이도 저도 아닌 송두율 교수의 '선택'에 대해서 나는 존경할 수도, 존중할 수도 없다. 그것은 그가 남과 북의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이어서라기보다는, 그가 이 땅에 들어와서 취한 '모호성'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지식인으로서 취한 논리적 모순과도 무관하지 않다.

'노동당 입당은 불가피한 통과의례' 주장은 '언어의 유희'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송두율 교수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송두율 교수 ⓒ 오마이뉴스 권우성
우선 그는 10월 2일 기자회견에서 로동당 입당 경위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

"저는 노동당원으로 의식하고 활동해온 바 없습니다. 남한에서도 외국 출국시 소정의 소양교육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의 첫 북한 방문 때 받았다는 '주체사상 교육'과 '노동당 입당'은 1970년대 북한을 방문한 방문자들이 거치는 일종의 불가피한 통과의례였습니다.

그 당시 행한 행동들은 3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의 저의 뇌리에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저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국정원에서도 이렇게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리라는 생각도 없이 제가 먼저 자발적으로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


송 교수는 73년에 첫 북한 방문 때에 받은 '주체사상 교육'과 '노동당 입당'을 '소양교육'이나 '입국신고서와 같은 불가피한 통과의례로 받아들였다'라는 '언어의 유희'를 통해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70년대에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전부 입당원서를 썼던 것은 아니고 입당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또 과거에 미수교국(공산권 국가) 여행자가 출국 전에 한나절 동안 받던 '소양교육'이 북한에 자진입국해서 받은 '주체사상 교육'과 같을 수는 없다. 또 해외 여행자라면 누구나 쓰게 돼 있는 '입국신고서'가 '사로청'과 당세포의 추천·심사와 2주간의 교육 과정을 거친 뒤에 선택적으로 가입할 수 있는 '입당' 절차와 같을 수는 더더욱 없다.

북쪽의 조선로동당 입당 원서는 남쪽에서 선거 때만 되면 '쪽수'를 늘리기 위해, 때로는 돈 주고 받는 입당원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조선로동당 규약은 당원 자격을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위하여 헌신하는 주체형의 공산주의 혁명투사"이자 "당의 유일사상 체계로 확고히 무장된 조선공민으로서 당의 노선과 정책을 옹호, 관철하기 위하여 견결히 투쟁하며 당규약을 준수하는 근로자"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특수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의 입당문제는
당중앙위가 특별히 제정한 규정과 절차에 따라 심의"


그렇기 때문에 로동당 당원은 1년의 후보 기간을 거친 후보 당원들 가운데 일정한 심사를 거쳐 선발되는 것이 원칙이고, 후보 당원이 되려면 입당 신청서와 입당 보증인(당원 경력 2년 이상) 2명의 보증서를 당세포에게 제출해야 한다. 물론 입당 보증인은 피보증인의 사회·정치생활을 잘 알아야 하며 보증의 진실성에 대하여 당 앞에 책임을 지게 돼 있다.

그러면 당세포(당원 5∼30명 단위의 당의 최하 기층 조직) 총회에서 입당 청원자의 참가 하에 입당 여부를 토의·결정하는데, 이 결정은 시·군 당위원회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 그런 뒤에 입당 청원자의 후보기간이 끝나면 당세포는 총회를 열고 정당원 자격 여부를 심의·결정한다.

다만, 예외는 있다. 로동당 규약은 "특별한 경우에는 입당 청원자를 후보기간을 거치지 않고 직접 당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 "특수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의 입당문제는 당중앙위원회에서 특별히 제정한 규정과 절차에 따라 심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해외나 남조선에 거주하는 '동포'와 '인민'을 당원으로 받아들일 때에 한해 당중앙위원회에서 특별히 제정한 규정과 절차에 따라 심의하는 것이다. 바로 그 '특별히 제정한 규정과 절차'가 2주간의 주체사상 교육 '필증'과 당원 교육 입당 '선서'이다.

'강철 김영환'은 방북 전에 남파간첩 윤택림(로동당 사회문화부 부부장)에게 포섭되어 남한에서 이미 '현지입당'을 했었다. 그러나 그는 91년 방북해 2주간의 교육을 받은 뒤에 정식으로 입당절차를 밟아 '입당 선서식'을 가졌고, 송두율 교수 또한 2주간의 교육을 받은 뒤에 입당 선서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도 송 교수는 "3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의 저의 뇌리에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저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로 남아 있지 않다"는 말로 입당의 '대수롭지 않음'과 자신의 '대범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잘 알기 때문에 옹호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가 '거물간첩'과는 거리가 먼 '소시민'임을 강조한다.

양파껍질 벗겨지듯 고고한 철학자에서 왜소한 기회주의자로 전락된 모습

그가 정말 대범한 사람이라면 '김철수'라는 가명을 쓰는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황장엽씨의 주장에 대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소송(민사소송)을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개인 대 개인의 민사소송이기 때문에 국정원이 직접 개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승소한 것을 가지고 자신의 과거를 적당히 얼버무리고 갈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막상 국정원이 예상치 못한 증거들을 내밀자 말을 자꾸 바꾸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자신의 삶의 궤적이 양파껍질 벗겨지듯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그는 '고고한 철학자'에서 '왜소한 기회주의자'로 전락해 가는 느낌이다. 그는 최근에도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일찍이 노동당 가입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점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

"제가 국민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노동당 가입사실을 말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미 30년 전의 일이고, 제가 당원으로서 이름을 날릴 만한 그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송 교수는 또 전향서와 관련해 "내 과거 전체를 부정하는 전향서를 결코 쓸 수 없다"면서도 검찰에 제출한 '반성문'에 진정한 반성의사가 담겨져 있지 않다는 지적이 일자 "다시 반성의 뜻을 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제 송 교수 문제의 본질은 전향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도대체 송 교수는 언제까지 '반성문'을 쓰겠다는 것일까. 또 송 교수는 반성문은 얼마든지 써도 과거가 부정되지는 않지만 전향서를 쓰면 과거가 부정되기 때문에 쓸 수 없다는 것일까. 송 교수는 왜 노동당 입당(선서)은 북한 방문의 '통과의례'로 받아들였으면서 전향(전향서)에 대해서는 '통과의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완전한 반성'은 사실상 전향이나 다름없고, 그것은 친북활동을 하고 '돌아온 탕아'의 조국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홍준표 의원 "송씨는 사상범이 아니라 파렴치범"

송 교수가 '조국'에 돌아와 살려면 최소한 이런 의문들에 대해 국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성의 있는 답변을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지금 와서 "나는 로동당에 가입한 사실은 있으나 정치국 후보위원은 아니다"라고 주장해봐야 공허한 동어반복일 뿐이다. 그런 주장은 바로 황장엽씨가 송두율 교수를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로 지목했을 때 했어야 했다.

그런데 송 교수는 자신이 노동당원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황씨에게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증거가 있으면 대라'고 윽박지르고 명예가 훼손당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를 제기했다. 그리고 승소하기까지 했다. 그렇기 때문에 홍준표 의원 같은 이는 국회 정보위 국감에서 "송씨는 사상범이 아니라 파렴치범"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이다.

'공안'이 아닌 '민족'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그의 언행에는 납득할 수 없는 구석이 적지 않다. 사실 그는 들어올 때부터 현지 특파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은사인 세계적인 석학 위르겐 하버머스가 동행하려고 했는데 건강이 안좋아 함께 오지는 못했다는 식으로 하버마스와 독일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는 독일 국적자임을 강조해 평균 한국인의 자존심을 긁어 놓았다.

또 한국에 들어와서는 조사를 받을수록 궁지에 몰리자 일요일에 대사관에 가봐야 무관밖에 만날 수 없다는 점을 알고서도 그는 굳이 일요일에 독일대사관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독일 친구들은 "야만 사회(한국)에서 빨리 돌아오라"고 한다는 얘기도 소개되었다. 이처럼 독일 국적자로서 독일 정부의 보호 하에 있으면서, 그가 이제 와서 "독일로 추방되느니 감옥을 택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김영환은 지난 91년 북한공작원의 제의에 따라 조유식과 함께 방북하여 노동당에 입당했다. 김영환은 그후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반성했지만 "그 당시에는 북한은 주체사상이 구현된 사회이며 북한과 연계하여 남한 혁명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던 만큼 방북과 노동당 입당은 당시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70년대 초중반 유럽은 좌파 지식인들이 압도했다. 아시아에서는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등의 '공산화 도미노'가 지배했다. 늘 현실에서 부대끼고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멀리 떨어진 유럽에서 보기에 미국의 식민지 남한은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북한에게 언제 먹힐지 모르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바로 그때 그는 북한을 방문해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꼭 3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남한을 방문했다. 그 30년의 갭을 채우는 것은, 힘들지만 그가 '선택한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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