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마차에서 새어나오는 백열전등의 불빛처럼, 아련하고 희미한 추억이 있는 곳. 벌써 중문해수욕장은 찾아온 손님들로 파도가 일고 있었다.
'쏴-아'하고 밀려오는 파도는 백사장 모래 언덕 위에 하얗게 지도를 그린다. 중문해수욕장은 활처럼 굽은 긴 백사장과 하얀 모래, 기암절벽과 푸른 숲이 조화를 이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자주 이용되는 세계적인 해수욕장이다.
특히 중문해수욕장은 서귀포시가 서귀포 70경으로 지정한 한 곳으로, 4계절 관광 휴양지다. 따라서 경관적, 생태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아 '아시아의 진주'라고도 말한다. 그 이유는 청정 해수욕장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불야성을 이루었던 모래언덕에는 추억과 낭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언제 보아도 다정다감한 것은 모래 위에 서 있는 정자이다. 마치 마을 모퉁이를 지키고 있는 터주대감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가면 좋을 듯 싶다. 지난 여름 피서객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었을 야자수 나무와 정자가 더욱 겨울 운치를 자아낸다.
바다가 파도를 토해내듯이 정자에 앉아보니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오염된 찌꺼기가 희석되는 듯하다. 모래밭에 늘어선 야자수 나무가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바다를 가슴에 안고 파도 소리를 듣는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할까?
여름바다가 청량제처럼 시원하다면 겨울 바다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전망대에서 보는 겨울바다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추억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연인들이 이 겨울의 주인공이다. 넓은 백사장 위에서 시선을 높이고 바다를 바라보면 겨울 바다는 어떤 색깔일까?
이들의 마음은 세상이 모두 내 것처럼 부자가 된 기분일 게다. 무한 경쟁시대에 살며 살벌한 자리싸움을 하다가, 타협하고 공유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게 하는 곳. 바로 그곳이 겨울바다였으면 좋겠다.
중문해수욕장은 길이 560m, 폭 50m 정도의 백사장을 품은 흑, 백, 적, 회색 등의 네 가지색을 띤 "진모살"이라 는 모래가 특이하다. 진모살이란 '긴 백사장'이라는 말로 이곳의 모래 벌은 넓이가 약 7만3천 평으로 만조시에는 4∼50m앞까지 바닷물이 차 오른다.
이 진모살에서 펼쳐지는 낭만 또한 각양각색이다. 어린 소녀들은 무슨 기도를 하는지 모르겠다.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를 껴안고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부디 이들에게 겨울바다가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곳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밀려오는 파도에 행운을 기다리는 강태공의 모습도 마치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 같다. 무엇을 낚고 있는 것일까? 파도를 낚고 있는 것인지, 세상의 시름을 바다에 버리고 있는 것인지? 모래밭은 지키고 있는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 할아버지! 무엇을 잡고 계셔요" 라고 물으니, 할아버지께서는 대답대신 웃기만 하신다. " 많이 잡으셨어요?" 라고 되묻자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른다.
겨울 바다를 지키고 있는 할아버지 곁에서 잠시 친구가 돼 주었다. 할아버지가 외로울 것 같아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 부산에서 여행을 왔다는 중년의 부인이 이다. 겨울 바다를 감상하고 있는 이들이 황진이처럼 느껴졌다. 파도에 손을 담가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파도는 요술쟁이처럼 저만치까지 왔다가 다시 뒤돌아간다.
중문해수욕장의 진모살의 한 켠에는 겨울을 마중 나온 철부지 소녀도 눈에 띄었다. 모래 위에 글씨를 새겨 보기도 하고 꽃과 나비를 그려보기도 한다. 그리고 거꾸로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저 어린이가 거꾸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부디 때묻지 않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보여지기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래밭의 묵묵히 지키고 있는 것은 천년 묵을 천연동굴이다. 동굴 안에 들어가자 안경 위에 안개 낀다. 바깥 기온보다 따뜻하다. 동굴 안에서 보이는 바다는 아주 쪼끄맣다. 잔잔한 바다가 마치 이해와 용서 그리고 너그러움을 주는 것 같았다.
이 동굴은 길이는 15m로, 그 뒤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이처럼 중문해수욕장 주변은 해안암벽을 따라 수 천 종의 희귀식물이 자생하는 곳이 많아 생태관광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암벽은 어느 예술가가 한 조각 한 조각을 붙여 놓은 것처럼 섬세하다.
그리고 벼랑 끝에 아스라이 몸을 의지하고 있는 희귀식물은 진한 감동을 준다. 바위 조각마다 중문해수욕장을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 화이팅'. ' 우리 사랑 영원히' 등 깨알 같이 새겨진 흔적들을 보며 이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특히 중문해수욕장은 파라세일, 바다래프팅, 수상스키 등 해양스포츠의 최적지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곳은 환경운동연합이 실시한 '수질환경성' 조사 결과, 전국 44개 해수욕장 중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선정된 바 있으며, <모닝캄>지에 세계 여행전문작가에 의해 '아시아의 베스트 10' 해변중의 해변으로 추천소개 된 바 있다.
중문해수욕장 갯바위 옆에는 바다를 낚아 겨울을 만끽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전복 죽과 생선회. 해물탕. 해녀들이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바다 진주를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들 산해진미다. 이 산해진미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는 있듯이, 분명 겨울바다는 이들의 가슴속에 이해와 용서. 너그러움도 함께 채워주리라 믿는다.
검은 현무암이 조화를 이룬 바다 풍광. 아련한 추억을 낚아보는 파도. 야자수 모래언덕을 거닐며 자신이 살아가는 현 주소를 암기 해보는 해변.
그 파도 소리는 바다의 선율을 타고 겨울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흰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