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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인 과정없이 서명한 공적 고증서가 악용됐지만 검찰의 면죄부로 작용했다.
ⓒ 심규상
얼마전 대전지역 한 세도가의 선조를 독립운동가로 조작하려는 음모가 진행된 적이 있는데 여기에 이 지역 국립대학교의 역사-철학과 교수들이 가담했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던진 바 있다.

독립운동 행적 고증을 의뢰를 받은 대학교수들은 그가 실제 항일독립운동을 했는지 여부를 연구, 조사하고 확인하기는커녕 이와는 반대로 확인되지 않은 항일독립운동 공적내용을 무조건 인정하는 공문서에 서명하였다.

정작 고증 서명에 반대한 교수는 같은 대학의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또 다른 사학과 교수였다. 해당 분야에 정통한 교수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거부한 일을 어쩌자고 비전공 분야 교수들이 하나같이 책임지지 못할 일을 자처하고 나선 것일까.

<오마이뉴스>의 보도로 이같은 사실이 공개되자 문제의 교수들은 "훌륭한 분이라고 하니까 믿고서 한 것 아니겠냐", "다른 교수가 관련 서류를 가지고 와서 추천해 달라고 해 믿고 한 것이지, 독립운동 여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해명했다. 스스로 엉터리 고증에 서명했음을 시인한 것이다.

당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학자적 관심이나 책임보다 의뢰인의 누구 인지 등 연고와 사회적 지위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대학총장이나 되는 사람까지 나서서 미확인 내용을 고증한 연유가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다.

이들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고 공적서에 고증 서명한 당사자는 당시 이 지역 국회의원이였던 한 건설회사 명예회장의 조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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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 교수 5명이 연서로 고증한 내용은 A4 용지 4쪽에 이른다. 이중 주요 내용을 대강 옮기면 이렇다.

“1895년 을미사변 발발하자 단발령 반대운동 참여, 1896년 의병 초병장 맡아 각종 전투 참가, 1903년 경부선철도 용지 수용관련 보상운동, 1905년 을사조약 반대 충청유림궐기운동 참여, 1907년 국채보상운동, 1919년 김용원, 김직원 등과 대전일원에서 3.1만세운동 주도, 만세운동 도중 대검에 찔리고 총탄에 맞아 쓰러짐, 만세운동 주모자로 수배됨, 6년 동안 은거하다 대검과 총탄에 의한 상처로 숨짐. 관련 기록 소실되고 관련 증언자 숨짐.”

이미 알려진 대로 공적내용에 수 차례 등장하는 애국지사 김용원 선생은 3.1운동 당시 대전이 아닌, 상해로 망명해 활동한 것으로 실증되고 있다.

▲ 대전 은평공원 내 세워진 '휘호비(왼쪽)와 생애비(오른쪽)'. 해당 단체는 당초 애국지사 김용원 선생의 휘호비와 생애비를 세운다며 국고를 지원받아 뒷면에 새기고 앞면에는 엉뚱한 사람의 비를 세웠다.
ⓒ 심규상
이들의 고증서명이 담긴 서류는 곧바로 국가보훈처로 넘겨졌다.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로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보훈처는 고증서명 자료 외 이를 뒷받침하는 거증자료가 불충분하다며 선정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하지만 엉터리 공적 고증서의 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고증서는 국가보훈처만이 아닌 대전시청, 대전 서구청 등 여기저기 관공서를 떠돌았다.

교수들로부터 공적 고증서를 받은 의뢰인은 고증서를 내세워 진짜 독립운동가의 생애에 자신이 내세운 고인을 끼워 넣었다. 진짜 독립운동가의 생애마저 변조하는 어이 없는 행태로 이어진 것이다.

나아가 대전시청-서구청으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공공장소(은평공원)에 버젓이 가짜독립운동가의 생애비와 휘호비를 세웠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진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로부터는 흉상을 세워준다며 몇 백만원을 받아 챙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행위에 면죄부를 준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엉터리 공적 고증서였다.

경찰과 검찰은 애국지사인 김용원 선생의 후손인 김옥경(67. 대전광역시 중구 문화동)씨와 박준희(여. 57)씨 부부가 “조부인 김용원 선생의 행적에 엉뚱한 사람을 끼워 넣고 비문을 변조해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변조 당사자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건을 "혐의 없다"며 무혐의 처리했다.

무혐의 사유는 “첨부된 공적서가 OOO 교수 등의 고증을 받아 작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허위사실로 명예훼손 하였다는 범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물론 경찰과 지방검찰청, 고등검찰청 어디에서도 해당 고증 교수들을 불러 고증 서명한 근거와 배경을 확인하거나 추궁하지 않았다. 국립대 총장과 교수들의 엉터리 고증서가 수사기관에까지 위력을 발휘한 셈이다.

김씨 부부가 개인사 조작에 직접 나선 당사자 못지 않게 이들 교수들의 행위를 괘씸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씨 부부는 지난 1월 초 엉터리 공적서를 고증하고 나선 해당 교수들에게 질의서를 발송했다. 비학자적 태도를 꼬집고 늦게나마 사과라도 받아낼 심산이었다. 실제 김씨 부부의 경우 왜곡을 바로잡고자 적지 않은 경비를 들여가며 거주지인 미국에서 대전을 오고 간 횟수만도 지난 몇 년동안 10여 차례에 이른다.

김씨 부부는 각각의 질의서를 통해 “어떤 근거로 확인되지 않는 엉뚱한 인물을 애국지사인 우리 조부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을 함께 했다고 고증하였는지, 고증을 의뢰한 사람은 누구인지 등을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제시한 답변시한은 지난달 10일이었다. 하지만 1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 누구로부터도 답변서는 물론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았다.

김씨 부부가 이들을 학자적 자질은 물론 양심마저 없는 사이비교수들이라고 비난하고 나선 것은 이 때문이다.

김씨 부부는 검찰의 ‘무혐의’ 처분서와 대답 없는 ‘질의서’를 들고 가슴을 치며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다.

“대체 이들이 학문을 하는 학자라 할 수 있습니까? 학자는 고사하고 양심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잘못했다는 사과 한마디도 못한단 말입니까?”

이들 교수들이 알기는 한 것일까. 비학문적이고 반학자적 행위가 남긴 엉터리 공적 고증서로 국가 예산이 축나고 진짜독립운동가의 생애가 변조당한 사실을. 그 엉터리 고증서가 면죄부로 둔갑해 진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에게까지 정신적 물질적 고통과 피해를 주고 있는 사실을.

김씨 부부가 해당교수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로지 사과 한 마디다.

“'미안합니다'라고 한 마디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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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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