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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연합뉴스)주한미국상공회의소와 한국관광공사가 문화관광부 공동 주최로 6일(한국시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한국 국가브랜드 제고를 위한 '서울팝스오케스트라 투어 아메리카' 개막식에서 단원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 연합뉴스
2-3년 전의 일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의회에 방청을 갔다가 마침 그곳을 방문한 한국의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들을 만난 적이 있다. LA 시의회에서는 정식 회의 시작에 앞서 방문단을 소개하고 그들을 환영하는 일정이 있었다.

방문단의 대표자가 환영에 대한 감사의 말을 했는데,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은 유난히 그가 한국과 미국이 "혈맹"임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을 기억하는 이유는 혈맹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반복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미국이 왜 피로 엮어진 "친구"인지에 대해 설명하는데 꽤 오랜 시간을 투여했기 때문이다.

미국 한 도시의 지방의회를 방문하는 자치단체 공무원들이 국가간 외교 자리에서나 쓰일 만한 외교 수사를 쓰는 것이 적합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감사의 말을 한 대표자로선 아마도 미국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행한 처음 연설이 아니었을까 짐작을 해본다.

그는 "고마운 나라" 미국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그런 얘기가 적합한 자리인지 아닌지를 판단한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본다.

지난 3월 5일 서울 팝스 오케스트라 미주 공연이 UCLA 로이스홀(Royce Hall)에서 열렸다. 공연은 한 미국인(주한미상공회의소 관계자로 추정)의 인사말로 시작되었는데, 그 인사말이 공연에 대한 기대를 반감시켰다.

그는 "이 공연은 50여년 전 우리(미국)가 지켜준 한국이 그동안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라는 요지의 인사말을 했다. 팝스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알리는 인사말에 왜 미국과 한국의 역사적 관계가 끼어 들어야 하는지 나로선 심히 의문스러웠고, 그래서 그 인사말은 내게 '우리가 예전에 거두어 먹여 살렸던 고아가 이제 이렇게 훌륭하게 자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라는 투로 들렸다. 그러나 그 정도는 참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공연이 시작되면서 그런 불쾌감은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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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팝스오케스트라 지휘자 '한국 비하' 발언 물의

공연비평가가 아닌 나로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좋았고, 특히 전자 바이올린 연주가인 유진 박씨나 소리꾼 장사익씨의 공연은 만족스러웠다. 잠시 가라앉아 있던 불쾌감은 공연 도중 지휘자의 거듭된 망발과 함께 더 큰 불쾌감으로 찾아왔다.

지휘자는 딱딱한 객석의 분위기를 좀더 공연의 취지에 맞게 움직여 보려는 듯, 연주 사이 사이에 매우 "짧은" 영어로 "긴" 시간을 떠들었다. 도무지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와 미국 정치인들을 들먹인 몇 차례의 조크는 매우 위태위태 해 보였다.

좋은 연주에 대한 감흥은 어디론가 확 달아나고 불쾌감이 다시 밀려든 것은 지휘자가 한국을 비하하는 내용으로 '조크'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연주 도중 관객들의 박수를 유도해내는 노련한 쇼맨십을 보였는데, 그 연주가 끝나자 박수를 잘 맞춘 관객들에 대한 찬사를 보내면서 한국에선 만나기 힘든 장면이라고 했다. 오천년 넘도록 이겨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라서 박수에 인색하기 때문이란다.

이 '명대사'에 이어 그 지휘자는, 지휘를 해보고 싶은 미국인과 이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싶은 한국인 한 사람씩을 무대 위로 불러내어 실제 연주를 맡기는 이벤트를 열었다. 실제로 지휘를 맡은 미국인이 능숙하게 지휘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지휘자는 그가 알고 있는 영어의 모든 찬사를 다 끌어내어 그 미국인을 칭찬했다. 그가 "미국인이기 때문에" 그토록 지휘를 잘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노래를 부르면서 박자를 몇 번 놓쳤던 한국인은 지휘자에게 면박을 당했다.

곧이어 무대에 나왔던 두 사람에게 서울팝스오케스트라의 공연 음반을 한 장씩 선물로 주면서는 믿기 힘든 얘기를 했다. "Korea, 5000 years, What the hell…." 한국이 50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200년 갓 넘은 미국의 역사에 비할 바 아니다라는 의미의 말을 덧붙인 것이다.

공연이 그렇게 끝났더라면, 아마도 정신나간 한 사람의 말실수로 치부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준비된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의 박수에 화답하는 앵콜 공연을 시작하면서 아예 속을 뒤집어 놓았다.

무대에는 스크린이 내려왔고, 한국전쟁의 참담함으로 시작한 슬라이드는 최근 한국의 경제성장을 보여주는 사진들로 채워졌다. 팝스 오케스트라 공연에 그런 슬라이드를 끼워 넣은 기획 의도도 유치하기 짝이 없었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마지막 사진은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나란히 펼쳐진 장면으로 채워 넣었다.

한국전쟁으로 참담했던 한국이 미국의 도움으로 이만큼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오히려 안쓰러웠다.

UCLA에서 열린 이번 공연은 주한미국상공회의소와 한국관광공사 공동 주최, 문화관광부 후원, 삼성전자, 포스코, 현대자동차의 협찬으로 미국 10개 도시를 순회하는 '다이내믹 코리아, 허브 오브 아시아!(Dynamic Korea, Hub of Asia!)' 공연의 첫번째 순서였다.

한미 양국간 경제 협력의 중요성을 재조명하고 한국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기획되었다는 공연은 태생부터 이미 문제점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케스트라 공연에 왜 한미관계가 끼어 들어야 하는지, 그 공연에서 한국의 문화수준을 깎아내리고 미국의 고마움을 극찬해야 한국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는 것인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대부분 재미동포로 채워졌던 객석을 볼 때 주최측의 기획의도가 달성이 되었는지도 의문스럽다.

보수단체의 집회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진, 한 손에는 태극기, 한 손에는 성조기의 모습이 이제 낯설지 않다. 한나라당의 소란스러운 의총에도 이 모습은 등장한다. 그들에겐 미국이 이 땅에서 들어온 이후 어떤 이득을 보았는지,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사소한 문제일 뿐이며, 한국이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는 움직임조차 불경스럽다. "어려웠을 때 도와줬던 고마움"을 차츰 잊어 가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든지 이런 종류의 사고를 칠 수 있다. 미국인들이 혹시라도 노여워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한국의 반미 기운을 서둘러 덮고, 한국을 대표해서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누가 한국을 반미 성향이 있는 나라라고 했는가? 이렇게 '사례 공연단'까지 보내는 나라를….

문화관광부 게시판에 올린 지휘자 하성호씨의 해명문

네티즌 여러분께!

미주 L.A. 동포들의 애국어린 마음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지난 3월 5일 L.A.에서 거행된 공연에 대해 동포분들에게 심려를 본의 아니게 끼치게 됨을 진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도 여러분들과 같이 애국적인 충정에서 미국 10개도시 순회 공연에 임했읍니다. 제가 미국손님들을 초대하는 지휘자의 입장에서 미국민들에게 약간 과장된 극찬을 한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한국을 비하하려 한 뜻이었다는 비난은 억울합니다.

왜냐하면 한국 5000년 역사의 우울했던 과거를 알림으로 해서 현재 문화, 경제적 한국의 발전상을 극대화하려는 표현을 하였을 뿐이며 손님을 초대하는 한 사람으로서 겸손한 겸양자의 의미를 마음에 담는다는 뜻에서 미국인들에게 과도한 칭찬의 표현을 한 것이지 어떠한 의도도 없으며, 더욱이 본 순회 공연의 기본 취지를 상실케 하고자 함이 아니였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므로 네티즌 님들의 애국적인 고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남은 일정은 더욱 표현에 순화를 약속드리며 더욱더 애국적인 마음으로 한국을 홍보하고 한국을 자랑하겠읍니다. 네티즌 님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L.A. 에서 지휘자 하성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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